공 준 2018.10.10 18:52

길고 슬픈 블루()





 현(독립큐레이터)



그럼 나에 대한 이야기를  줄게. 그건 정말 길고 슬픈 이야기(tale)!” 생쥐는 앨리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길고  꼬리(tail).” 앨리스는 생쥐의 꼬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꼬리가 슬프다는 거야?”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고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 둘러싼 세계는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다.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동물들, 별안간 커지거나 작아지는 신체, 법체계가 무너진 재판 과정…. 앨리스가 토끼 굴에 들어가면서 겪는 일련의 기묘한 사건을 그리는  작품은 전형적인 회귀식 모험 소설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어린이를 대상으로  동화 장르임에도 도덕적, 교훈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독특한 문학적 위상을 차지한다. 이상한 나라의 무질서한 판타지 세상은 19세기 급속한 산업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이행하던 영국 사회상을 일부 반영해 풍자하고, 현실 세계관과 대립하면서 현대 철학 사조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특히 캐럴은 말장난, 패러디, 어크로스틱 등을 활용해 기존 언어 규칙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파괴하면서 일종의 언어게임 독자에게 제안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무의미로 전복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현실 세계의 불합리성을 되새기고, 주인공 앨리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서두의 인용문에서 길고 슬픈 이야기(tale)’라는 논리적인 서사가 한순간 생쥐 꼬리(tail)’라는 이미지로 전환됐듯이, 예측 가능한 구조의 단절은 기존의 체제를 탈주하는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정희민은 오늘날 보편화된 디지털 환경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와 이를 지각하는 방식을 회화언어로 탐구한다. 그는  개인전 <어제의 파랑>(2016)에서 외형적 유사성을 띠는 풍경화와 풍경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에러가 발생한 컴퓨터 화면처럼 변형한 회화를 선보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일종의 관습 속에서 특정한 힘을 얻듯이, 풍경 역시 회화의 주된 소재로서 상징적인 권력을 취득해 왔다. 작가는 이러한 풍경을 중첩, 왜곡하면서 기존의 이미지가 반복해  전형적인 구도를 해체하는데,  과정에서 구체적인 형상은 증발하고 하늘빛을 이루던 색채만 잔여물처럼 남게 된다.  풍경() 얽힌 유장한 이야기는 낱장의 푸르뎅뎅한 이미지로 대치되고, 장르의 질서가 안정되게 유지되어  시절은 어제 시간으로 회고된다. 이후  번째 개인전 <UTC-7:00 Jun 오후 3시의 테이블>(2018)에서 작가는 토끼 굴에 빠진 앨리스처럼 프레임 안으로   길을 헤매고 들어간다. 그는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작업에 도입하면서 오후 3시의 테이블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을 설정하고 다양한 정물이 비치된 장면을 캡처하듯 고스란히 떠냈다. 특정한 장소를 지시하는 듯한 제목은 캔버스를 벗어난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과잉 확대된 낯선 시점, 중력과 물성이 소멸한 매끈한 표면, 크기를 가늠할  없는 정물은  가상공간의 질서를 탐색하려는 시도를 연거푸 실패하게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정체성은 일관된 수학적, 지리적 질서로 이루어져 계산 가능하지만, 정희민의 이상한 나라에서 현실의 규칙은 와해되어  이상 유효하지 않다. 신체 사이즈가 재차 변하는 앨리스처럼, 마우스 휠의 움직임에 따라 확대/축소되는 시점으로 관찰되는 정물들은, 허깨비 같은 덩어리로 다가올 뿐이다.

정희민은 회화적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고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이 여실히 드러나도록 기계처럼 캔버스에 복제한다. 그림의 개별 대상이 갖는 상징을 작품 해석을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만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무의미한 상황 자체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는  이상한 나라에서 현실을 단단하게 유지하는 약속들을 어기고 유희하면서 스스로의 정체를 고민해 나간다. 풍경화와 정물화로 대표되는 회화 장르의 상징성은 해체되고, 중첩된 레이어는 환영을 제거하며, 그림 곳곳의 얼룩진 미디엄은 그림의 세계와 그것을 보는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조성하는 제스처로서 작동한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혼란 속에서 길을 잃었지만 덕분에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제의 파랑  이상 여기 없지만, 정희민은 오늘날 회화와 화가의 정체성이라는 질문을 안고 파랑보다 짙은 감색의 망망대해에서 모험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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