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8.06.20 14:12

컬렉션으로서 작품, 고유명으로서 큐레이터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 전경 ⓒ김진호(이하 상동)

아카이브(?)된 50명의 작가 중 49개의 작품은, 한정된 그러나 꽤 풍요로운 선택지 속에 큐레이터들의 선택으로 분절된다. 선택의 교집합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 작품들의 ‘선택’들은 가령 큐레이터마다의 하루에 해당하는 개별적 전시들의 얼개를 띤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작품의 확장(적 수렴) 대신, 큐레이터 각각의 컬렉션 자체로 소급되며, 컬렉션 내 작품들은 의미로부터 표백된다(마치 90년대 히트 팝송 모음 테이프들처럼 그것들은 일종의 명확하지만 불투명한 비-아카이브다). 전시‘들’은 큐레이터(들의 서문)들을 통해 필터링되지만, 작품의 의미와 내용은 선택들을 통해 강화되기보다 더욱 흐릿해진다. 

‘큐레이터→작품→스크리닝’이라는 블랙박스[각주:1]의 투명한 공식을 가정하는 가운데, 하나의 스크린이라는 최소한의 설치와 선형적인 순서의 루프로 괄호 쳐진 스크리닝은, 개별 큐레이터의 실천적 담론으로부터 확장되기보다 그들의 ‘자의적’ 기호에 수렴될 공산이 크다―큐레이터의 선택이 전시에 대한 담론으로 수렴될 공산은 적다. 이러한 세팅 값은 이 전시를 순전히 큐레이터의 고유명들로 치환하는 결과로 낳는다, 결코 작가들이 아니라.[각주:2] 그러나 ‘블랙박스’라는 일종의 고정된 세팅은 해체, 재조합 과정을 겪게 된다. 곧 여섯 명의 큐레이터들(최정윤, 장진택, 조은비, 안대웅, 박재용, 권혁규)은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탈출하며 전시를 새롭게 작동시키고자 한다. 전시 자체의 고유명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하나의 스크리닝이라는 상영 방식 자체에 제동을 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앞선 공식에 따른 영상들의 무한한 듯한 선형적 ‘흐름’은, ‘48시간 스크리닝’(전시)에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다. 

명료한 전시의 위상과 불투명한 아카이브

전시는 이미지의 집적[각주:3]이거나 이미지로의 특수한 입구와 출구[각주:4], 또는 시청각적 이미지[각주:5]로의 발산이거나 부유하는 공간[각주:6]이 된다. 하나의 스크리닝 아래 스크린의 내용 자체를 큐레이팅의 주제로 삼은[각주:7] 건 오히려 예외적이며, 마지막 큐레이팅이자 상영되지 않은 여분의 작품들을 정확한 상영 시간에 트는/갈무리하는, 곧 아카이브의 잠재성을 아카이브의 구현 자체로 바꾸는 방식[각주:8] 역시 이 전시 자체의 형식으로부터 기인(하며 수렴)한다. 따라서 개별적 큐레이팅들은 작품(의 고유성)에서 시작하기보다는 전시의 위상을 세우기 위한 노력에서 기인하며, 작품은 그 알리바이가 된다. ‘전시→큐레이팅’으로 가는 과정에서, 작품들은 그들 간의, 그리고 자신과의 어떤 결속력을 잃는다.[각주:9]   

하나의 스크리닝, 그럼으로써 영상에 주어진 온전한 시간성은, 그 ‘하나’의 스크리닝을 해체하는 방식들에 의해 깨어지며, (보통의) 전시를 이루기에 이른다. (보통의) 전시는 공간의 이동을 전제하고 동시에 강제한다. (보통의) 전시는 고유한 관객의 자리를 물리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며, 단지 유동하는 상상적 관객만을 상정한다. 이렇게 ‘스크리닝→전시’로의 변전은 각 작품들을 그 자체로 소환하고 그 자체로 수렴하게 하는 것 대신에, 그것들의 불포화된 세계를 포착하게 한다―이것은 추출된 ‘동시대-예술-이미지’인가?―곧 동시대라는 미제에 대한 산만하고 흐릿한 감각으로 포화된다. 

나아가 작품을 작가에게로 돌리는 것 역시 요원한데, 서문의 이름순으로 작품을 배열한 최정윤, 단 하나의 작품만을 선택한 안대웅, 그리고 순서상 마지막 초대 큐레이터로서 타임 테이블 문서를 제시하며 작품의 고유명을 회복시킨 권혁규를 제하면, 순전히 작품을 일회적으로 목격할 때, 이 작품이 누구의 작품인지는 크레디트를 통해서 인지될 따름이다―박재용의 경우 그 크레디트조차 없애버렸다. 결국 전시는 이 모든 작품에 맞는 각각의 고유한 자리를 찾아주는 대신, 이것들이 불포화되는 지점 자체를 가리키고 있다. 

어떤 50개 작품들의 동시대의 아카이브라는 X 값과 어떤 동시대의 큐레이터라는 Y 값은 전시를 통해 전면화되지 않는다. 곧 ‘작품으로부터의 전시도, 큐레이터로부터의 전시도 아닌, 큐레이터라는 존재를 실험하고 전시하기.’ 무한한 그러나 계열화되지 않은 그리고 규명되지 않은 잠재적 아카이브―이전에 어떤 기준에 따라 계열화됐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성립하는 아카이브―로부터의 선택이라는 명제, 곧 큐레이터를 프로그래머로 변형시키는 이 암묵적 강제는, 전시라는 조건 자체를 실험하(며 아카이브(에 대한 명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거나 작품을 이미지로 환원시키는 과정 가운데, 동시대 이미지 탐구의 너른 범주로 수렴한다.

스크린의 더하기 혹은 빼기

그 후자의 대표적 예는 장진택이 구성한 세 개의 스크린상에서 무작위로 교차되는 영상들이다. 이는 이미지로 둘러싸인 세계, 곧 이미지 아틀라스를 꿈꾸며 그것을 일정 부분 그리고 있는 듯하다. 넝마주이 같은 채집은 이미지를 (표면적으로) 펼쳐놓으며 (실은) 욱여넣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이를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산만한 주의의 지각 방식’이라 (긍정)할 수 있을까. 마치 관객은 시선을 통해 재핑 하듯 이미지를 보며 튕겨져 나간다. 이미지들은 때로 상호 교차, 또는 교호한다. 동시에 이미지는 불가침의 영역을 갖는다. 이미지는 이미지로 수렴될 뿐이다. 다른 한편 이미지는 텍스트만큼의 과잉(+) 혹은 여백(-)을 갖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커다란 변수가 변곡점을 만드는데, 사운드는 이미지처럼 중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 스크린에만 보존되는 (때론 존재 않는) 하나의 목소리’는, 하나의 권력을 얻는 듯 보인다, 이미지를 재단하며. 소리 없이 ‘세 개의 자막이 대치될 때’, 각각의 이미지는 자막에 온전히 포획된다면, ‘하나의 자막과 세 개의 이미지’가 병치될 때, 말은 이미지를 지배 혹은 통합하는 데 실패하는 듯 보인다―또는 이미지는 말을 초과하거나 비껴 나가는 듯하다. ‘두 개의 좌우 영상이 시차를 갖는 동일한 작품’에서, 마침내 중간의 작품이 갖는 권력/위계는 깎여 나간다. 이러한 여러 경우에서, 세 개의 스크린은 독자적이면서 서로 간에 교착되는 상태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무한한 우연적인 배치의 평면은, 세 개의 동시 스크리닝이라는 조건에 더해진 랜덤이라는 상영 방식에서 기인한다.[각주:10]  

앞선 전시가 작품들을 교차와 점프로 기능하는 무빙 이미지로 변환/확장한다면, 극장 곳곳에 얼룩을 만드는 방식, 혹은 극장을 장소 특정적 관람 동선으로 바꾼 박재용의 전시는, 스크리닝을 일반적인 전시장으로 재조직한다. 극장 바깥부터 전시는 시작되고 스크린을 넘어 극장 안으로 파고들며―극장을 확장하거나 해체하며―문을 열어두어 소리는 극장 안팎으로 배어 나온다. 극장 안 중앙 스크린은 하나의 배경 음악이자 이미지가 된다. 소리는 장소의 격차를 두고 일어나기 때문에 입체적인 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장소(관객)의 이동은 작품들과의 입체적 거리를 형성한다. 이는 스크리닝을 전시로 해체했다는 점에서만 특별한 지점으로, 애초 스크리닝이라는 하나의 전시 방식 자체에 대한 지시와 비평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전시를 스크리닝으로 치환한 전시의 특별한 콘셉트를 누락한다. 결국, 이 전시는 극장의 물리적 조건까지를 전시하되, 하나의 스크린이라는 장애[각주:11]를 수용할 순 없었다. 

나아가 다섯 대의 아이패드로 현장을 찾은 관람객에게 주소를 부여하고 임시적 접속을 전시 시간 동안 가능케 하는 조은비의 큐레이팅은, 중앙 스크린을 축소시키는 것을 넘어 아예 대응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이 전시 역시 관객을 장소로 치환하는데, ‘아이패드-관객’만이 전시를 구성한다. 여기서 극장의 좌석은 필연적이면서 잉여적인데, 드넓은 극장 안에는 단지 다섯 명 이하의 관객만이 있다. 다시 말해 광대한 극장 안에는 미소한 불빛이 비추는 고개 숙인 관객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절차를 거친 임시적 아카이브의 접속은, 단지 구글 드라이브로 가는 경로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극장이 필연적인 매개의 지점을 주지만, 극장이라는 장소 자체가 필연적일 필요가 없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극장으로부터의 매개는 오히려 진부해진다[각주:12]). 

하나의 작품만을 가지고 극장을 퍼포먼스로 재구축하는 전략을 택한 안대웅의 전시에서, 수 분 길이의 강신대 작가의 작품은 디제잉의 부가적인 이미지로 작용하며, 일견 이미지와 사운드의 간극을 드러낸 장진택의 큐레이팅과 조우한다. 사운드와 원래 붙어 있던 이미지의 해상도는 변용되고, 이는 그 이미지를 덜 선명하게 보게 만든다. 마치 지배적인 사운드 아래, 이미지는 탈락되고 떠도는 듯하다. 얼룩이 되는 조명과 그 앞에 선 사람들로 인해 이는 더욱 증폭된다. 물론 이는 스테이지에서의 참여를 가정하지 않는 순전한 보기의 영역을 가정할 때 성립한다. 하지만 이 전시는 스크리닝을 포함/확장/변용하면서, 동시에 스크리닝을 해체하는 방식으로써 이뤄진다―스크리닝이 가능할 수 있는 거리(극장의 스테이지)를 관객으로 대체된 퍼포머의 고유 영역으로 재소환하며. 

결과적으로 예술의 효과는 관객의 두 층위로 나뉘는데, 실제 스테이지에서 예술의 일부가 되는 관객(의 감각)과 이를 바깥에서 감각하는 관객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전자의 예술은 후자에 있어 스크리닝이 된다면, 전자의 관객에게 예술은 이미지가 체현되는 경험 자체로 수렴된다. 스테이지보다 극장의 객석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물리적 측면을 이 전시 역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각주:13]는 점에서, 예술의 효과는 적어도 후자의 관객에게는 간접적으로 작용하는 듯 보인다―그들은 무대로부터 탈락하고 있고 적어도 그들에게 예술의 효과는 실패하는 듯 보인다.[각주:14] 이후, 강신대와 안대웅의 토크 시간은, ‘예술(로부터)의 효과’ 자체를 드러내는 대신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예술의 효과이면서, 그 자체로 스크리닝(무대)을 구성하는 것일 것이다.  

강신대 작가의 자극적인 사운드와 파편적 군사/전쟁 이미지들의 결합은, 깨지지 않은 상태로는 48시간 스크리닝에서 온전히 구현되는데, 어떻게 보면 이러한 스크린 자체의 물리적 크기, 그리고 그 이상으로 중요한 스피커의 고속 출력이 작품의 전시를 비로소 완성한다고도 하겠다. 극장 스크리닝이라는 하나의 전시 방식은 결과적으로 큐레이터들의 전략에 따라 해체되거나 축소 또는 지워지는데[각주:15], 어쩌면 전시에서 순수한 길이 대신 순간-이미지로 축소되(어 경험되)는 영상 작품들에 대한 동시대 예술의 전략(과 체험)이 징후적으로 전시된 것일 수도 있다. 

질문을 통해 구축되는 전시

이미지의 비동시적 집적이라는 측면에서, ‘큐레이터의 관점에서 기존 영상(들)을 선택(하고 재배치)하는 것만으로 전시가 이뤄질 때, 이는 적어도 그 작품(들)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지시하고, 나아가 새롭게 갱신하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각주:16]―대다수 큐레이터들의 축소된 스크리닝(과 확장된 전시)의 전략 이후, 48시간 스크리닝에서 다시 가능한 질문―으로부터 나아가, 결과적으로 상영 시간표 없는, 랜덤으로 구성되는 48시간[각주:17] 동안, 이 동시대적 이미지를 (개별 작품들로 되돌려주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면) ‘차이의 반복’으로 (재)인식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 질문을 새롭게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 역시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모든 작품을 온전하게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작품의 이미지―곧 모든 작품을 이미지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가정해도―가 결속되거나 결절되는 지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문의 서문’[각주:18]에서의 ‘전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각주:19]은, 강연[각주:20], 스크린-공간과 작품들과 큐레이터들이 구성하는 결과를 전시라는 명제와 서로 저울질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새롭게 도출되고 있는 반면, 전시 자체의 담론과 스크리닝 방식과 큐레이터들의 서문들을 통해 사라지는 작품들[각주:21]은, 작품의 결격을 전시하는 전시에 대한 단 하나의 의문만을 촉발시키는 듯 보인다. 곧 ‘전시’는 필연적으로 휘발되(는 질문을 던지고 단지 그럼으로써만 존재하)고, 작품을 온전히 규명하는 데 실패하는 가운데, 극단적으로는 작품은 단지 잠재적 아카이브의 차원으로 영원히 수면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듯 보인다. 사실상 작품을 봉인 해제하는 것은 어쩌면 전시라는 장치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역설적으로 48시간 스크리닝 같은 일차적인 스크리닝의 조건이 아니었을까―그렇지만 이 역시 독립적인 ‘전시’라 한다면, 여기서 (서문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큐레이팅은, 관객의 시선을 통해 상상적으로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각주:22]

아카이브 자체의 단순한 펼침―무작위적이라 어떤 의도를 오히려 궁구할 수 없는―그리고 영상을 스크린에 되돌려주는 단순한 이 방식은, 전시의 (작품들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실패를 다시 49개의 작품이라는 전시의 원점 또는 이전으로 되돌린다. 표면적으로는 큐레이터들의 고유명을 전시하는 데서 나아가,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은 어쩌면 동시대 전시의 전략이 보증하지 못하는 스크리닝에 대한 태도와 가치, 문화의 부재까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파악되듯 이 전시는, 전시가 아닌, 전시라는 명명[각주:23] 자체를 의문에 붙이며, 여러 실험이 결합된 이 전시의 범주와 양태를 전시(들)로 재규정하는 차원을, 관객에게, 나아가 동시대 예술계에 되돌리고 있다.[각주:24] 애초 전시 프로세스의 일단을 보여주는 제목으로 보이는 이 전시명―‘전시(작품)의 전시(큐레이터)의 전시’―에 따라,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은 전시의 요소들을 (영상 매체라는 작업, 큐레이터, 공간, 서문으로) 축소하며 전면화해서 전시한다. 

단 하나의, 큐레토리얼 실천이 존재한다. 전시를 구성하기! 전시의 조건들을 실험하고, 전시를 이루는 말들로부터 전시를 도출하기. 어쩌면 작품, 큐레이터, 그리고 전시의 실천이 아니라, 전시라는 명명을 수행적으로 작동시키는 역능이 이 전시의 핵이 아닐까. ‘전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이 전시가 전시로 성립하는지의 여부마저도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결론은 이렇게 될 것이다. ‘전시라는 조건 자체를 스스로 궁구하지 않는 전시는, 안이하다고, 또는 관성적 전시의 부분(이름)으로 소환되고 있다고.’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1. 사실 물리적으로 극장의 불그스름한 조명은 온전히 블랙박스를 만들지도 못한다. 블랙박스를 꿈꾸는 전시는 블랙박스의 결격을 전시한다. [본문으로]
  2. ‘이름들의 컬렉션’이라는 전시 방식은 <비평 실천>에서 이미 실천된 바 있다. 평론가들의 비평에 대한 추모와 미래적 꿈꾸기의 방식은 실은 현재에 작동하지 않고, 단지 그런 현재를 지탱하는 평론가들의 고유명이 교착하며, 이러한 자리 자체가 전시가 된다―대신 이번 전시에서 기획자 이양헌은 평론가들이 아닌 큐레이터들을 큐레이팅(함으로써 자신의 큐레이터의 지위를 은폐)한다. [본문으로]
  3. 전시, ‘예술: 어쩌면, 그건 정말 취향의 문제…(Art: Perhaps, it’s so much a matter of taste...)’[큐레이터: 장진택] [본문으로]
  4. 전시, ‘VVM : 비디오 벤딩 머신(VVM : VIDEO VENDING MACHINE)’[큐레이터: 조은비] [본문으로]
  5. 전시 ‘효과의 기술(Art of Effects)’[큐레이터: 안대웅, 참여 작가: 강신대] [본문으로]
  6. 전시, ‘오디오 비디오 인터리브(AVI), 동영상 전문가 그룹(MPEG), 마트료시카 미디어 컨테이너(MKV), 퀵타임 무비(MOV)가 소개하는: 다중 해상도 파빌리온(Audio Video Interleave(AVI), Moving Picture Experts Group(MPEG), Matryoshka Media Container(MKV), and QuickTime Movie(MOV) Present: A Multi-resolution Pavilion)’[큐레이터: 박재용] [본문으로]
  7. 전시, ‘잘자흐 강의 흐르는 강물처럼(Like the flowing river, Salzach)’[큐레이터: 최정윤] [본문으로]
  8. 전시, ‘인저리 타임(Injury Time)’[큐레이터: 권혁규] [본문으로]
  9. 이 명제는 그것들의 본질이 내재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가정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작품들이 개별 큐레이터의 컬렉션 아래서 찢기고 결합하고 또 대다수 부재하는 채 존재하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문으로]
  10. 랜덤이라는 단순한(프로그램에 일임된) 그러나 복잡한(예측할 수 없는) 상영 방식은, 권혁규에 의해 부정되는데, 이는 그러나 작품을 조금 더 잘 볼 수 있기 위하거나 잘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전체의 전시를 원래의 아카이브에 대한 잠재성을 현전시키는 측면에서 지시되는, 인지적이고 강박적인 실행에 가깝다. 결코 비랜덤이라는 방식, 또는 타임 테이블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작품의 현존에 대한 충실성이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전시는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보이게 하는 것’으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 자체가 작업(을 보는 것) 자체에만 초점을 두고 기획된 전시로 보기는 힘들다. 권혁규의 전시는 사실 여분의 작업을 보존하(며 보게 하)기보다,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을 메타적으로 규명(하며 전시의 구조를 전시)한다―타임 테이블 역시 작업들을 새롭게 묶는 식으로 직조하는 최소한의 관점이 투영된 결과가 아닌, 말 그대로 나머지 작업들의 상영 시간을 정확하게 전시 시간 동안 맞추기 위한, 단순한 산수에 기댄 작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11. 객석 중앙에 설치된 중앙 스크린을 향한 모니터-스크린은, 객석의 일부를 변용하면서 중앙 스크린의 축소판으로서 그것과 대립한다. 결과적으로, 극장 전반에 편재된 개별 스크린들의 크기와 중앙 스크린의 크기는 이질적(인 감각)인데, 이 모두를 개별 영상을 처리하는 스크린이라는 단일 차원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2. 여기서 ‘전시는 하나의 공간에서만 작동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역시 진부한 것임이 판명된다. [본문으로]
  13. 관객석을 벗어나(?) 스테이지에서 춤추는 일부의 사람은, 이미지를 목격하는 관객이라기보다 스크린의 일부로 구성되었다. 거꾸로 무대를 벗어나, 주요한 부분으로 상정될 수 없는 객석에 앉은 일부의 사람은, 이미지를 목격하는 대신 예술의 효과로부터 소외되거나 간접적으로 이를 겪게 된다. [본문으로]
  14.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일반적인 동시에 관성적인 거리 두기로부터의 보기―거리 두기로서의 보기가 아닌―가 실행된다는 점에서는 예술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을 보는 것이 아닌 ‘예술의 효과’가 직접 몸으로 매개되는 무대 위의 관객들의 시선에 그들―작품이 아닌 작품 바깥에 위치한―역시 포섭되며 발생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곧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호 작용적인 미디어의 일부로 무대 바깥의 관객들 역시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효과의 기술’이 무대와 객석, 작품과 몸, 몸과 몸의 접합(을 이상적으로 좇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둘의 간극, 거리의 차이를 메타-시현하(며 나아가 관객이라는 주체를 탐구하려는 목적을 갖)는 것으로 본다면, ‘효과의 기술’은 다초점적인 레이어를 가지며, 그 효과의 측면 역시 관객의 층위에 따라 복잡하게 적용된다고 하겠다. [본문으로]
  15. 하나의 예외로서, 하나의 작품만이 선택된 ‘효과의 기술’은, 순전한 작품의 이미지 대신, 디제잉의 시간에 맞춰 작품을 늘리는 가운데 발생하는 글리치(라는 효과), 그리고 이미지를 다루는 기술을 보여주는데, 사실 이는 작품을 덜 보여준다기보다는 작품의 위상을 새롭게 구축하는 데 가깝다. 여기서 이미지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 된다. [본문으로]
  16. 이러한 질문은 전시에 대한 도덕적 금제에 가까워보인다―이는 이후 강연의 틀을 빌린 전시에서 가시화된다. 사실 작품은 충분히 전시의 충분조건이나 전시는 작품의 필요조건이 아니며, 나아가 전시는 작품(들)을 온전히 포괄하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물론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전시는 작품들을 총합하는 것이 아니며, 작품(들)을 가로지르거나 작품들 사이를 건너가는 것이기도 하다. 또는 작품들을 (새롭게) 작품들로 만든다. [본문으로]
  17. 사실, 48시간 스크리닝을 각각 두 강연자(김지훈, 방혜진 순)의 이틀 동안 강연이 가로지르는데, 특히 김지훈에 비해 플로어로 마이크를 일찌감치 돌린 방혜진의 강연에서는, 먼저 ‘전시(영상 작품)를 침범한 강연―이로써 ‘48시간’은 물리적 의미에서 상징적 의미로 변환된다.―이 드러내는, 당대 전시(큐레이팅)에서의 작품의 위상’이라는 (문제적) 징후에 관해 문제제기를 던진 방혜진에 이어, 이에 대한 강한(?) 비판이 후속적으로 청중으로부터 튀어나왔는데, 어차피 모든 작품을 랜덤으로 뒤섞어 트는 가운데, 작품은 실제 손실되거나 부족하게 상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기서 인식되지 않는다. 또한 강연 역시 전시의 부대 행사가 아니라 전시(의 일부)라는 측면이 간과된다. [본문으로]
  18.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는 작품으로서의 전시(‘Exhibition’)에서, 다시 큐레이터들의 전시(‘Exhibition of Exhibition’)로, 나아가 이를 큐레토리얼 실천의 위상으로서의 큐레이팅으로 재구조화된다. 따라서, 여섯 명의 큐레이터들의 각기 자신들의 전시들에 대한 여섯 개의 서문에 선행하는 이양헌의 서문은, ‘서문의 서문’의 위상을 갖는다. [본문으로]
  19. 이 질문은 전시 자체로 환원되는 전시에 대한 모더니즘적 질문으로 환원된다기보다는, 전시에 대한 질문 자체가 전시의 조건을 구성하는, 동시대 전시 자체의 수행적 위상(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재출현한다. 정확히 “무엇이 전시이고 전시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전시와 전시가 아닌 것을 경계 지어 명확하게 판별하는 게 가능함을 전제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전시인 무엇’과 ‘전시가 아닌 무엇’을 질문하는 가운데, 전시라는 개념 자체를 계속해서 새롭게 갱신해 가는 과정에서 작동/성립하는 (‘전시’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또한 이는 전시와 전시가 아닌 것이 뒤섞이고 서로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동시대 전시 자체의 위상과 결부된다. [본문으로]
  20. 48시간 스크리닝을 꿰뚫는 두 번의 강연 외에 사실 전시가 열리기 전, 아니 전시 첫날, 전시를 여는 강연(이영철, 김장언, 현시원 순)이 마련되었는데, (이 전시와 관련해서) 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지 않았다. [본문으로]
  21. 사실 영상을 이미지로 축소시켜 관람하는 관객, 또는 그것을 유도하는 많은 전시의 형태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동시대 예술의 서문은 이미지를 한편으로 물리적으로 축소시키고(이는 불가해한 동시대 예술에 대한 전언과 결부되는 부분일 수 있지만, 가령 우리는 이미지 자체를 탐구하는 시간을 포기하고 서문을 믿고 이미지를 조금 더 빨리 지나치는 게 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결합시켜 매끈하게 만든다(이미 모든 것을 보고 정리한 관점에 기대는 것은, 이미지 탐구의 어려움을 축소시킨다.)는 점에서 전시를 비약하거나 변용하며 완성시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 내용에 대한 부분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관객은 작품들 속에서 길을 잃는다, 또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 길을 찾을 수 있는지 자체가 묘연하며, 전시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소급되는 관람객이라는 주체로 결정될 때―순전히 작품 보기나 작품 읽기에 매진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길을 모색할 수 있다. [본문으로]
  22. 관람객들은 작품들을 묶고 (재)배치하며 전시를 (재)구성할 수 있다. [본문으로]
  23. ‘이름’이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명명’은 이름이 탄생하는 지점을 나타내며, 따라서 ‘이름’이라는 위상 자체를 점검하게 하는 유일한 이름이다. [본문으로]
  24. 가령 ‘소문의 전시’라는 것이 존재한다. 회자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전시의 존재, 나아가 그 전략을 이 전시는 잘, 드물게 보여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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