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11.28 23:25

▲ <비명자2>(작/연출 이해성) [사진 제공=극단 고래] (이하 상동)

‘(소수의) 타인의 한정할 수 없는 고통은 결국 사회적 고통으로 전이된다’는 작업의 교훈은, 타인의 고통을 사회적 고통으로 체감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측정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정의되(지 않)는 그들의 고통은 결국 소통이 불가능한 비언어의 양적 크기로 측정되며(‘반경 4km까지 물리적 영향을 끼치는’) 동시에 이해 불가능한 이해로, 말할 수 없는 우리 자신으로 수렴된다. 곧 이 작업에서 ‘타자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다’라는 명제와 ‘타자의 고통은 절대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는, 그런 ‘타자의 고통을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어도 공감할 수는 있다’는 명제를 더하며,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비명을 끊임없이 지르는 끊임없이 죽고 또 등장하는, 연극 안에서 영상을 통해 클로즈업이 유일하게 작동하는 존재들의 비명을, 죽음에 가닿아 있는 비-존재의 발화를 재단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크기로 인식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작업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성찰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고통을 마주해야만 하는 당위를 주어주는 데 가깝다, 그 고통이 완전한 것으로 마주할 수 있음으로부터.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수 있음의 윤리적 가능성과 타인의 고통을 마주해야만 하는 윤리적 당위는 서로를 마주보며, 그 사이의 간극을 봉합한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이다. 나는 이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고통이다.’ 이러한 삼단 논법으로부터 전제되는 것은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에 대한 윤리이다. 비명자의 비명이 일러주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데, 그의 목구멍(‘말의 물리적 통로’)에 닿는 접촉, 곧 비명의 진원지에 이르는 고통이 뒤따른 이후, 그 고통이 발원하는 곳에서 죽음을 거래하는 최후 협상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비명자는 커다란 스크린에서 비로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대입된 이야기는 비판적으로 조명되는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를 비롯해 세월호(“페리호”)로 향해 가는 온갖 사회적 의제들이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사건들. 이러한 현실들은 연극을 초과하고 동시에 연극으로부터 벗어난다. 이는 실제의 목소리를 단지 전유한 것으로, 연극에 흡착되지 않는데, 연극의 바깥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극은 현실의 바깥임을 자처하지 않는다. 비명이라는 기표가 싸고 있는 비명의 기의가 곧 현실이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고 한편으로 분리되는데, 연극은 현실을 직면하며 현실 앞에서 머뭇거리기 때문이다.

현실을 대리하는 순간 비명을 꺼뜨리는 연극은, 현실을 직접 가리키며 연극임을 멈춘다. 사실상 우리는 각색된 현실, 다만 그것이 연극이기 때문에 사실임을 온전히 자처할 수 없는 진짜 현실을 본다. 연극은 연극과 현실을 분리시킨다. 그 간극은 사실 헐겁게,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다. 과도한 비명과 온전한 목소리는 곧 대립된다. 하지만 목소리가 말의 현실로서의 내용을 갖는 데 반해, 비명은 말의 효과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명은 지루함을 준다. 곧 현실을 일차적인 것으로 두고, 미학적 효과를 텅 빈 상태로 두며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 것으로 ‘의미화’함으로써 그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우리는 비명을 듣는 동안 고통을 강제당하고 강제당해야 한다고(사실은 강제당할 수 있다고) 연극은 주장한다(거기서부터 연극은 연극을 벗어난다), 연극이 현실의 부차적인 것이 됨으로써.

우리는 고통의 진원지를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사회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연극은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들의 목구멍에 손을 갖다 대 그들의 고통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비명자의 비명을 마주할 때 ‘무아’의 상태로 만들고자 하는 파사헌정 연구소의 파사팀은, ‘고집멸도’라는 사성제의 원리를 되새기며 세계와 나의 경계 없음의 경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는 명백하게 실패하는데, 우리는 사회(적 고통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거리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비명자의 비명이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거리 없음에 대한 사실이다.

연극은 비명자의 비명, 타자의 고통을 강제하는 것 이전에 그것이 강제당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한다. 결국 연극은 자신의 ‘무력함’을 부르짖는다. 텅 빈 기표로, 아니 충만한 기의만이 있는 공백으로, 현실 앞에서, 현실에 맞서기보다 현실에 맞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현실에 귀 기울이며, 곧 그들의 말을 동어 반복적으로 재현하며. 비명은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음의 층위에서 들을 수 없음의 극단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들을 수 없음을 가시화하며 듣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듣기의 가능성을 노정한다.

▲ <비명자2>(작/연출 이해성) 파사팀의 요한(배우 박완규) [사진 제공=극단 고래] (이하 상동)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듣기를 실천하는 측면에서 파사팀의 요한은 그 가능성을 체현하는 유일한 이다. 그를 통해 연극은 무당이라는 현대의 온전한 대리자를 가정해 내고, 고통의 나락에 빠진 이들을 위무한다. 어떻게 보면 비명이라는 비언어의 극단과 같이, 말이 열리는 최초의 언어라는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선취하는 이에게 우리의 역할을, 노력을 빼앗긴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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