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11.02 15:12

춤에 있어 휴머니즘은 온전한 피신망이 될 수 있는가

▲ 차진엽(Cha Jinyeob), <리버런 : 불완전한 몸의 경계(riverrun : Interface of the unstable body)>ⓒ박상윤 [사진 제공=전미숙 무용단] (이하 상동)

시작과 동시에 무대 전면에 나타난 움직이는 이미지는 빠르게 스쳐 간다. 거기에 ‘비장한’ 표정으로 무대 ‘중앙’을 차지한 차진엽은 그에 ‘결연히’ 맞선다. 이미지(시각예술가 빠키의 작업)의 내재적 리듬에 때로는 공명하나 근본적으로 작업이 움직임의 응전의 형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곧 이미지(의 움직임)와 움직임의 합치보다는, 어떻게 이미지 안에서 움직임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 혹은 움직임이 대등한 경기를 벌일 수 있는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미디어와의 무용의 협업이 대부분 기술적 층위의 우월함, 놀라움으로 환원되고 마는 것의 공허함이 오래 된 흔한 문제 제기라면, 반면 미디어의 몸 자체를 하나의 다른 새로운 몸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 곧 이미지 기계로 기능하는 또는 그에 보조를 맞추는(기계와는 또 다른 궤적을 그리는) 차진엽의 신속하고 절도 있는 안무는 답을 주는 듯하다. 어느 정도 빠른 속도의 현란한 화면의 동적 구도에 맞춰 파묻히면서 꿈틀거리는 또 다른 움직임-이미지는 이미지의 연장, 연속으로 기능한다. 곧 확장되고 증폭되고 부가된 이미지로 기능한다. 그 속도를 처리하는 몸의 긴박함은 ‘이미지의 연장’의 양면으로, ‘이것은 사람이다!’라는 메시지와 결을 같이 한다.

그러니까 이 작업은 역설적으로 포스트휴먼의 새로운 임계점을 드러내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휴머니즘의 패러다임이라는 낡은 패착에 빠지는데, 왜냐하면 곧 이미지를 (그것이 불가능함에도) 몸으로 온전히 소급시키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여기서 차진엽의 표정은 하나의 주제이자 메시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징후(적)인데, 앞서 언급한 ‘결연한’ 표정은 오히려 투명한 몸(그리하여 무표정한 표정)을 구현해 기계의 또 다른 몸을 드러내는 대신, 대등한 인간의 중심으로서 영토를 한결같이 주장/고수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차진엽의 굳건한 얼굴은 어떤 감정을, 어떤 세계 속의 상황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차진엽은 이미지에 자신의 몸을 온전히 내어주는 대신, 강철(기계) 같이 그것을 왜 버텨냈을까(‘전통적 인간’의 실패는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가). 이는 이미지의 확장 대신 몸의 공고한 터전을 주장하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이미지가 완전히 무대에서 갑작스레 비어진 상황에서(곧 그 자신의 신체적 임계 지점을 드러내지 않고, 동시에 이미지의 ‘지나친’ 홍수에 질리지 않는 치고 빠지는 방식) 무대 바닥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차진엽은 가로 밀려나지 않고 끝까지 무대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단지 사람 얼굴의 마스크를 단, 비인간의 신체를 지닌 가장-인간의 기계는, 차진엽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끝내 비껴 나가는데, 이로써 기계와 인간의 불길한 접합은 안전하게 차단된다(웃음을 안기는 해프닝으로 봉합된다). 어쩌면 차진엽의 춤은 (그 표정이 증명하듯) ‘기계 되기’라기보다는 일정한 리듬을 수행해야 하는 제의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커다란 돋보기로 스스로의 얼굴을 비출 때 강조돼 드러나는 건 차진엽의 얼굴로, 시종일관 엄숙한 표정인데, 그 내적 감정은 실제 극 안에서 해소될 수도 해석될 수도 없는 부분이다. 또한 그 돋보기를 들고 이동할 때 일종의 도구를 이동시키는 자의 자연스러움을 택하는 대신, 굉장히 무게를 줘서 걷는 방식을 고수한다(사실 그 거울이, 거울의 이동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곧 시각예술과의 협업을 통해 구현되는 이미지-움직임의 두 가지 방식 이후, 우주와 같이 비어진 흰색 무대에서 로봇들이 막 뒤에서 움직이는 로봇들을 만나러 가고 마주하게 되는, 그러니까 인간 대 타자로서의 로봇과의 미래적 만남이, 어떤 서사의 축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음에도 그것을 구체화시키거나(제목에서처럼 ‘몸’이란 매체로 작업을 수렴시키고자 했다면, 차진엽의 몸과 표정 역시 더욱 투명해졌어야 할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그 미래가 갖는 함의에 대한 철학 역시 부재한다. 인간과 로봇은 단순히 기본적으로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한가. 아니 그 이전에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은 물론 없다. 곧 차진엽이 로봇과 마주하는 장면들이 매우 공허한 이유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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