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03.22 00:52

▲ <비평실천> 전시장 전경 [사진 출처=산수문화 페이스북]


전시장에는 단 두 권의 책만이 진열돼 있다. 그리고 이는 전시장 내 그것을 가지고 읽는 또는 복사하는 단 두 사람(청중)만의 권리로 복속된다. 일견 복사는 소유의 자율권을 허하는 듯하나, 복사를 하는 것은 재현 가치를 증폭시키는 대신 오히려 책이라는 원본의 가치를 승인하는 데 그친다. 그것은 나눌 수 없는 견고한 하드커버가 주는 물신적인 성격을 완전히 벗겨내지 못한다. 전시는 굳이 수많은 의자들을 뒤로 하고 두 권만을 볼 수 있게 진열했는데, 그 아래 쌓인 몇 권의 책 역시 만질 수 없는 물신 오브제로 기능한다. 이 두 책은 일견 이 전시장 내 전시 기간 동안만 허락되는 것처럼 전시되는데, ISBN이 찍혔다거나 표지에 어떤 내용이나 장식도 없다─곧 그 표면 자체가 장식이다.

읽기 전에는 모든 부분을 읽고 그 일부를 복사하거나 하지 않거나 또는 일부분만 읽고 말거나 일부분을 읽고 (그 나머지 혹은 그 부분을) 복사하거나 하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세 번째와 네 번째의 경우는 전시를 다 보는/읽는 것에 실패할 확률이 크다고 하겠다. 대략 1시간 남짓해서 모두 읽고 복사하지 않고 전시장을 떠났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텅 빈, 동시에 너무나 충만한 전시─한편으로는 너무 얄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 읽기에) 너무 많다─는 무엇을 말하는 또는 보여주는 것일까?

작품에 대한 어떤 주석, 해석, 보충 정도로 부가되는 비평/평론/글이 그것만으로 한데 모임으로써 기존 예술계에서 부가되며 흩어지고 산발적으로 출현하는 어떤 흐릿한 형태가 하나의 영토에 붙박인다. 어떤 이미지의 직접적 참고나 보충도 없이, 그것은 온전하게 또 완전하게 자리한다. 일종의 모음집에 가까운 책은 그것의 유기적 짜임을 주장하는 대신, 아니 그로부터 여실하게 실패하며, 그 글을 쓴 다양한 평론가들의 성좌를 구축한다. 성격이 다른 글들은 저마다의 주장을 하는 평론가라는 존재들의 목소리에 더해 이미지를 헐겁지만 구상한다.

사실상 단체전에서 각 작가들의 작업을 보고 호오를 나누는 게 자연스럽듯, 마치 이들은 다시 비교 측면에서 어떤 호오의 평가 대상으로 놓인다. 좋은 평론(가)이란 무엇인가? 동시대의 비평은 어떻게 구제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비평/평론(가)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반복하며 시작돼 그에 대한 위기의식으로부터 적당하게 그것의 가치를 (의문을 품지 않고) 전제한 채 좋은 평론을 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적당히 은신하며 끝을 맺는다(이러한 흐름은 곧 전시 기획자의 편집자적 엮음에서 기인한다). 곧 봉합되지 않는 비평 자체에 대한 메타 의식이 균열을 낳는다. 그 첫 글로서 안진국의 글은 다른 그들과 달리 단정하고 학문적이며 또 기존 비평에 대한 논의들을 압축하고 있는 반면 저자 자체를 소거한 듯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 측면이 큰데, 둘은 상관되는 부분일 것이다(글의 성격상 이해될 수 있지만, 비평보다는 비평가에 방점이 찍히게 되는 전시라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정현의 마지막 글은 이미 반복된 논의를 갱신 없이 재반복하는 측면이 크고, 글의 밀도 역시 높지 않았다―부러 쉽게 에세이 형식처럼 쓰인 것을 의도했으리라고 보인다.

그럼에도 이런 비평론 자체를 떠나 글들을 본다면, 구체성의 일면에서 작품/작가의 특질에 근접하도록 하는 글은 드물다(이는 공교롭게(?) 첫 번째 세마 평론상의 최종후보자 세 명이 이 전시를 참여하고 있지만, 그것을 묶은 책에서 박찬경이나 김현진 등 여러 필자가 언급한 비평의 기준이다.). 이는 한편으로 비평의 위기라는 전시에 전제된 하나의 문제의식의 축에 응전하며 새롭게 비평을 이야기하는 측면에서 주어지며 다른 한편으로 이는 결과적으로 추상적인 언어에 그칠 공산이 크다. 홍태림의 글이 스스로가 개입한 미술 현장과 관련해 여러 사례를 망라하는 특수한 영역의 비평이라면, 그리고 임근준의 글이 비평에 대한 역사적, 지정학적(동아시아적) 실천들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상이한 비평의 시점들을 점검하고 현재의 비평 자체의 토대를 갱신할 것을 요구('지금의 비평은 그 형식적 연구의 토대가 너무 빈약하다')하는 비평에 대한 방법을 이야기하는 시론(거꾸로 이는 비평을 하나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형식쯤으로 정의하는데, 그러한 풍부한 비평의 메소드 구축에 대한 당위가 이유보다 앞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이라면, 나머지 논자들의 글은 그와 성격을 달리 한다.

앞선 기준을 따라 두 개의 글을 보자면, 곽영빈은 현재 미술을 일종의 매체의 연장선상에서 다루는 가운데 패러다임의 큰 축의 변화를 신선한 참조와 독창적인 관점으로써 감지하고 제시하는 반면, 개별 작품들의 세밀한 논의가 더 보충되지 않아 큰 글을 예비하는 일종의 프롤로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권시우는 가장 작가/작품에 대한 논의가 풍성하고 세밀했던 반면, 그리고 구체성을 거의 유일하게 획득했던 반면, 두 명의 작가(강정석, 김희천)만으로 세대적 의식과 동시대 작가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일반론을 도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였다.

앞서 2권의 물신으로서 책이 놓인 것은, 결과적으로 소수의 독자를 위한 비평(집), 그것을 둘러싼 잠재적인 독자라는 식으로, 비평의 불확실한 독자를 가시하화는 측면이 있다. 한편 이의 완전한 소유화는 불가능하며 복사는 스캔과 달리 매체의 변환과 손실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는 2차 자료로서의 활용을 예비한다. 그럼에도 유통을 예비하지 않는 책은 어떤 소문으로서 비평, 흐릿한 기억의 일부로 남고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묶음에 가까운 책, 온전한 책이 되기에는 일시적인 집합에 가깝다고 보이므로─비평가들의 회합과 편집 논의를 통해 이 책이 구성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어쩌면 물신, 그리고 장소 특정적인 차원으로 소급되는 책의 질서를 통해 은폐된 것은, 곧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비평가의 위치를 몇몇 필자─가령 이런 측면에서 글을 쓴 이로 김정현, 한편으로 일종의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홍태림이 해당한다─로 두어 생생하게 비평계를 가시화하는 가운데 그들이 교류하는 지점의 비평만의 어떤 생태계의 측면 혹은 가능성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전시는 흥미로우나 표피적인 기획이라 생각된다.

흔히 평론가는 고독하거나 외로운 존재, 소수의 독자만을 상정(하는 데도 실패)하는 돈이 되지 않는 존재로 전제된다─이러한 문제의식은 정확히 이 전시의 출발지점 그리고 일련의 글들에서, 그리고 실제 동시대 평론가의 언어에서 놀랍도록 강렬하게 반복된다. 이것이 한편으론 평론가의 윤리적 태도의 일환이며 또 다른 한편으론 현실적인 문제라 하더라도 그러한 이념은 평론가의 동시대적 지위나 역할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에 근거한다.

오늘날 평론가는 차라리 예술가의 지위에 근접하거나 그들을 매개하는 역할, 또 그것을 정책적, 제도적 측면에서 환류하는 예술계에 더 긴밀히 접속한 채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에 가깝다. 곧 누구도 글을 읽어주지 않는 공허한 울림을 쏟아내는 이 이전에 예술가의 작업을 보충하거나 해석, 안내하는 매개자로서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강의, 기획, 멘토 등등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오히려 그 가운데 평론은 하나의 부분적 형식으로 자리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평론가의 폐쇄 영역이란 예술계, 나아가 사회 시스템 전반에 대한 문제의 일부로 해독되어야 하는 문제에 가깝다고 보인다.

평론가의 지위에 대한 고전적, 정확히 근대 이후의 담론을 회고적으로 반복하며, 출구 없는 전략, 곧 한 권의 물신화된 책에 모든 걸 넣고 가둬버린 이번 전시는, 결국 평론이 현재, 미래적 지위에 대한 형식, 동력을 고안하는 데 이르지 못한 채 이념적 차원에서 자기 스스로를 소거하며 과거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인상을 준다─물론 이 책 안의 글들이 잘 못 쓰였다거나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어떤 동력을 줄지에 대한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전제하는 한에서 말이다─어쩌면 평론(가)의 미래적 역할을 현실적인 측면에서 거론한 이는 필자로서는 임근준이 유일할 듯하다.

아쉽게도 일종의 담론 공동체, 동시대의 편집자 역할을 고안하는 운동으로서 지식 차원을 고안하는 흐름을 만드는 또 지속적으로 가져가는 차원에서, 이번 전시는 어떤 가능성도 보여주지 못하며─물론 전시 참여 필자 몇 명의 회의를 공론화했으나 그것이 전시 안에서 직접적인 내용이나 형식 자체를 구성하는 데 이르는 것은 아니다─, 비평이 (책으로써) 전시의 내용을 구성한다는 점 외에, 그리고 내용 일부 혹은 전부를 복사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체의 전파적 확장성을 더하는 일면이 있음에도 전시로서 형식의 새로움은 크지 않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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