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03.22 00:12

 

▲ 그들이 온다. 은밀하게, 빠르게, 2016, 단채널영상, 사운드


염지혜의 스크리닝 <그들이 온다. 은밀하게, 빠르게>(2016)는 짧은 시간에 부여되는 리듬과 일정 단위의 구별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후 김세진 작업과의 비교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비규격화적인 표현 형식은 소급되지 않는 이상한 차원/레이어로 빠져들며 해독 불능, 판단 유예/불가의 상황을 초래한다고 보인다.). 여기에 감상적이지 않고 유희적이고 장난스러운 말이 헐겁게 화면에 드러난다. 곧 그것은 목소리에 입힌다. 그럼에도 그 목소리는 결코 견고한 하나의 내레이터로 수렴되는 대신 일정하지 않은 인격체, 가상으로 형성된 캐릭터에 애매하게 부착된다. 사실 그러한 필연적 균열은 드러나기보다 전체적으로 헐겁다는 인상을 주는 정도에 그치게 한다.

▲ 열망으로의 접근, 2016, 단채널 HD 비디오, 사운드

김세진은 두 개의 커다란 스크린상에서 미술관의 타자를 다시 살려내는 것으로부터 전시를 연다(<도시은둔자>(2016)). 미술관을 지키고 돌보는 청소부와 같은 노동자들을 재현하는 가운데, 그들의 시선에 감상되지 못하는 작품들이 스쳐간다. 이는 미술이 목적이 되지 못하고 미술 외의 배경을 관리하는 이들의 시선에 작업은 타자이며 배경이다. 그럼에도 슬쩍 스치는 시선은 관리와 노동 바깥의 어떤 몰입, 사로잡힘을 상정하는 듯하다. 랑시에르라면 노동과 예술(적 행위)을 분리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의 몸, 시선 안에서. 그래서 이러한 포착은 예술과 현실의 의도적인 분리로부터 출발하는 노동자에 대한 제도적, 사회적 스테레오타입과 그것을 내파하는 노동자의 균열상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이는 재현된 것이고, 그래서 여전히 이념적이며 작위적이고 과거적인데, 미술관에의 타자(의 재현)를 통해 미술관이라는 제도'로부터' 미술이라는 형식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행위 자체가 움츠러들고 비가시적이고자 하는 듯한 모습은 우울하고 차가운 색감으로 더욱 강조되며 결과적으로 생동감 없는 분위기의 화면을 띤다. 그리고 이는 마치 (노동자와 관객의 구별은 허위라고 이야기하기보다) 노동(자)이라는 숙명을 강조하는 한편, 그 안에서 (예술이라는 '자연'적 형식, 예술적 인간이라는 이상향을 드러내기보다) 예술이 제도와 노동에 예속됨을 지시하는 데 더 강조점이 놓이는 듯하다.

한편으로 미술의 타자로서, 역으로 드러내는 온전한 몰입의 공간이자 순백주의의 화이트박스라는 이념형의 측면을 담보하는 노동(자)은, 프락시노스프라는 시각 장치를 통해 단편적인 접합의 시퀀스라는 일시적이고 영원한 행위 집산으로 노동은 구체화/단순화되며 거기에 대한 참조 측면에서 또 하나의 스크리닝이 이를 보증하게 된다―어쩌면 여기서 설치로 인해 스크리닝 <열망으로의 접근>(2016)은 비로소 형태를 얻고 다큐멘터리에 그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이념/연극과 구체/현실의 이중적 분화와 접합이 전시를 풍부하게 완성하며 어떤 간극을 노출한다. 재현과 다큐멘터리를 넘어 작가는 질문/시선과 이미지/형식을 고안하고 발명하는 첫 단추를 꿰고 있다고 할 것이다.

▲ 빛 온도 바람, 2016, 차광막, 비닐, 방풍막, 스테인레스 스틸 파이프, 조명, 가변크기

 

정소영의 작업 <빛 온도 바람>(2016)은 장소 특정적인 결을 미술관의 규격에 적응시킨 결과로도 보이는데, 이는 공간 자체에 대한 체험적 동선을 만들며 시각을 교차시키며 안과 밖의 끊임없는 전환을 꾀한다. 한편으로 도시를 압축적이고도 미니멀하게 재현한 공간 외부의 블록 형태의 구조물은, 오히려 미술관 실내를 벗어나며 도시를 재현하고 측정하며 이와 대립된다. 이는 공간적 체험을 가능케 하지 않는 낯선 외부이며, 수치적이고 표피적이다.

이런 대립된 정서의 층위에서, 강원도에서 작업을 했던 작가의 체험적 정서는 완전히 동결되지 않은 채 건물 가 너머에서 <돌>(2016)이라는 스크리닝에서 드러나듯 내용적으로는 '저 너머'를 반영하고 있으며, 설치적으로는 혼란스럽게 관객의 시선을 양분하고 신체를 분절한다. 사실상 이 스크리닝은 도시/자연의 대립적 양상을 매개하기보다, 후자 측면에 치우쳐 (관객을 설득하기보다) 그 지난 시간 자체에 대한 동기화를 강요하는 측면이 크다―그러니까 이 작업은 설명적이라기보다 실시간적이며 회고적이라기보다 현전적이다.

▲ 붉은 줄무늬, 2016, 우레탄페인트, 철판, 180 x 66 x 88cm

 

이은우의 작업은 디자인의 표피적인 심미성을 드러내는 데서 나아가 그것에 대한 기존 방식과 틀의 규칙 들을 전제해 가시화한다. 각각의 작품들이 상관관계를 갖고 엮이는 것은 아니지만, 전시장을 가장 적확하게 심미적 오브제들로 배치하는 가운데 작업의 출발선상에 대한 질문의 언어를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을 읽는/보는 데는 어떤 매뉴얼과 테스트가 필요하다고 보인다―물론 그 자체로 흥미로운데, 이런 표피적 가시성의 단위들을 직조하는 경향 역시도.

p.s. 이 글은 이미 대상이 김세진 작가로 확정된 이후에 쓰인 짧은 글로, 어떤 측면에서 김세진의 작업이 초점화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글에 반영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그럼에도 이 글은 그러한 기준을 절대화하지도 않지만 첨예하게 재질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네 명의 작가의 작업들은 하나의 완결된 형태라기보다 작업의 과정적 산물의 일부임을 보고 후속 과정을 지켜보는 게 관(람)객의 역할이 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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