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6.06.27 01:39

(이 글은 공연 실제 진행 순과 달리 관련 작업들을 연계하며 쓰였고, 마지막에 약간의 제언을 담았다. 첫날 프로그램인 윤자영, 오설영의 작업은 기술하지 않았다.)


 

<여전히 안무다-장치> 공연 사진[국립현대무용단 제공](이하 상동)

 

<An elephant in the room>에서 무대 위에 걸린 줄과 그 위의 봉지들은 얼굴의 (비)현상으로서 무대와 일상의 접면을 상정하는데, 그 경계로부터 위치한 여자, 곧 선-행위를 하고, 그 주위를 떠돌며 현장을 배치하고 '잉여'들은 그것을 수습하며 무대가 끊임없이 재생/소거된다. 곧 있는 것이란 그러한 사라진 행위 자체에 대한 기시감과 피로감 정도로, 매개자적 퍼포머와 현실 속 캐릭터의 접면에서 무대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에서 퍼포머들은 직접적으로 관객에 접면한다. 그렇지만 무대라는 게임의 규칙 안으로 계속 소급시키며 이 작업을 여타 다른 작업의 재현에 그치게 한다. 


 

의도치 않게 수행적 질서 자체를 재현 이상으로 선명한 내용의 현상 자체에 도달하지 못한 앞선 작업에서 곧 수행의 재현만이 남듯, 나연우는 <오늘의 공연(2016.6.26)>에서 여러 퍼포머들을 활용해 무대의 시작과 끝 지점을 알린다. 앞뒤 공연과 잘 부착되기도 하는 반면, 그렇지 않기도 한데, 공연의 바깥으로 상정되는 규칙 자체가 공연이 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흥미로운 지점을 안기는 시점은 어느 시점 정도였을까. 그것과의 텀을 확인하는 순간, 이 공연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은 정해진 미래에 있을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질 축적된 과거의 편집물"이란 나연우(?)의 정의에서 곧 시뮬레이션으로서 공연이란 전제는 현재에 수행됨으로써 은폐되는 것인가, 아님 사후적으로 개념을 획득하는 (비)진리에 가까울까. 그것은 암장되어서 완성되어야 하는 한편, 의도치 않게 진실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여)야 했을 것이다.

 


송주호의 작업 <응원세포>는 그 연장선상에서 이곳이 극장임을 주지시키는데, 극장의 규칙을 재현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폭력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중심 테제/성격인 '논-단스(춤)가 아닌 춤'에는 두 번의 부정이 각인되며 춤(에 대한 확장적 정의)이 아닌 것으로 돌아오거나 나아가게 되는데, 대별되는 극장 옮기기의 체격 차가 증명하는 완력의 무모함이라는 행위가 그 예일 것이다. 그렇지만 논단스에도 포함되지 않는 극장(따라서 관객)을 주체화하는 행위는 사실상 극장과 관객을 지우는 행위로써 가능해진다. 장치란 스펙터클을 아날로그적 행위로써 상쇄시키고, 극장을 관객으로 바꾸는 퍼포먼스는 빈 극장을 보여준다기보다는 관객의 위치를 빈 자리로 변용함으로써-곧 그럼에도 관객(의 시선)은 남는다-이곳이 극장이라는 과잉적 진리를 강요하면서 관객에게 철저히 외면받기에 이르는데-동시에 관객을 철저하게 무시하기에 이르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허구적 장면은 극장의 시작과 끝을 목도하게 하는 어떤 욕망에서 추동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극장을 지배하는 빈 시선 자체를 재현하는 셈이다. 극장이 장치임을, 관객이 관객임을 보여주는 것은 여타 다양한 공연의 무대 장치를 통해 일부분 그다지 주요하지 않게 늘 보여 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이 공연이 공연에 대한 공연으로서 가닿으려는 의지는 이해할 수 있는가? 


 

이곳이 극장임을 주지시키는 다른 작업은 남정현의 사운드의 공간에의 분포로써 초과하려는 사운드 실험 <그것과 그 것>(여기서 '그것'이 상징계의 명칭이라면, '그'와 '것'을 분기시킨 '그 것'은 실재계의 침입인 셈)으로, 어둠으로 극장을 가로치고 관객의 몸이 사운드와 닿는 접면으로서만 경계가 그 공간의 규격 자체에서의 경계로 이동하고, 또 바깥으로 열리며 들어오는 조명으로 극장 바깥을 어둠의 바깥, 빛의 내부로 인지하게 하는 또 다른 이동들을 그 속에 끼워넣는다. 그렇지만 극장의 경계 자체에 덧대어진 어떤 공간들에 대한 사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일인 데다, 라이브로 연주를 더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해 보이는 탓에-퍼포머가 경계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이것은 조악한 음악 재생이 스피커를 얼마만큼 채우고 싸우느냐의 정도를 어쩔 수 없이 관객이 시험해야 되는 경계에 이르게 된다. 개중 깔끔한 안무임에도.

 

 

주현욱의 <21세기를 위한 SF 안무>에서 SF에 대한 몇몇 문장들은 익숙한/닳은 것들인데, 무엇보다 하나의 글이라는 매체를 그것은 넘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가령 그러한 과거형 발화들을 한데 정렬해 보고 조합해 글을 완성해본다면. 이것은 22세기의 전언을 말하는 21세기의 sf소설이라기보다는 과거형을 의도적으로 자청하는 20세기의 라디오극-사물의 재전유를 통한 동기화/싱크 맞추기는 새로운 것이 아닌 변사 공연에 투입된 폴리 아티스트의 20세기 버전인 셈-이라는 매체적 재현에 더 가깝다.


 

강진안의 작업, <여집합 집집집 합집여>는 쓰여 있는 글을 참고하는 것이 빠를 듯하다-20퍼센트는 제하고. 무표정한 얼굴의 두 안무가/무용수의 시계 되기의 정례적 몸짓은 스타카토라는 정박에 맞춰져 있는데, 거기서 멈추고 재편되는 시간의 시점, 영상으로 넘어가는 이중 시간의 시점, 전체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안무 등이 깜빡 시간을 잃는 시점을 낳게 되는데, 주로 영상과 몸을 원근법적으로 수렴시키게 되는 가운데 시간의 그러한 분별도 무화된다. 미디어와 연접되지만 무표정한 얼굴과 이어지는 움직임들로만 짠 가장 단단한 안무, 결코 논단스가 아닌 그런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잃어버리듯 느슨한 집중에 몸을 맡기며 대부분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은경의 렉처 퍼포먼스격 작품 <나쁘지 않은 기억들>(피터 암프)가 한국 무용 신에서는 거의 최초가 아니었을까. 여전히) <무용학 시리즈 Volume I: 분리와 분류>에서 몸은 과시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제시되는데, 각종 무용단 유니폼을 벗음으로써 과거의 경험과 결부됐을 공연 관련된 여러 지표들을 제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이것은 설명되는 것이라는 것에서 나아가 이것은 무용이라는 것이라는 프레임이 그 위에 쓰인다. 익숙한 음악들로 무대의 변전을 취하는 가운데, 몇몇 인터뷰한 안무, 춤, 퍼포머 등에 대한 누군가의 의견들이 과도한 움직임에 일정 부분 동기화(되는 효과로 웃음을 주게)된다. '위-아래'에 맞춰 눅진하게 내려가는 움직임을 덜어낸 움직임과 매달려 있는 상위 포지션의 관객 캐릭터와 관객을 담은 스크린과 동기화되는 함성으로 이어지는 시공간의 연접, 확장은 깔끔한 안무다. 거기에 말은 내용도 형식도 아닌, 또 그에 맞춰지는 움직임 역시 춤도 언어도 아닌 이상한 흐름 속에서 어느덧 '무용은 무용이다'라는 지시적 거리 두기의 안무가 시효를 다한 것은 아닌지 하는 아찔함이 스르륵 스쳐간다(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지만 가장 좋은 작품은 아니었다는 사실).


p.s. 의도치 않게 별로였다는 의견을 많이 들었던 2014년을 보지 않아서, 2015년이 안무랩은 가장 좋았던 시기가 아닐까. 전체적으로 브로슈어가 팸플릿 이상으로 깔끔하고 잘 나온 편인데, 반대로 실제 국립현대무용단 홈페이지에 개별 안무랩 작업 이름이 들어가지 않고, 그리고 브로슈어에서 서문 격으로 쓰인 글 역시 들어가지 않은 건 착오이든 의도였든 무조건 잘못된 것이다. 서문 격의 글 제목에서 굳이 '장치' 뒤에 푸코의 '(apparatus/dispositif)'임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누락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글은 간명해질 수 있을 것. 안무랩 첫 번째 프로그램인 <금박의 춤>에 대한 글은 조금 더 상세한 글로써, 작업자든 관점이든 그것을 매개하든, 제시되었어야 할 것.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인가 하는 명칭으로 참여한 멘토가 맡은 작품에 대한 분별도 엄밀히 표기됐어야 하는 부분. 큐레이팅 글과 각 작업의 글과 잠재된 멘토들의 의도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브로슈어에서는 통일된 상위 관점이 잘 작동하고 있어야 할 것, 그것은 큐레이팅에 대한 글로써. 지성의 사공이 과도하게 많은 것 아닐까. 논-단스의 계보와 춤의 확장적 실험 자체의 계보는 분별되어야 할 것이고, 후자는 큐레이션의 계보를 살피는 일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춤이 아닌 춤에 대한 담론적 고투가 그리 춤과 상응하지 않는 측면-말(무대에서는 몸짓)이 넘치는 현상-과 이것은 춤이다라는 자기 지시적, 메타 비평적 춤의 시선이 이제 기시감으로 다가오는 시점 사이에서, 안무의 다음 행보는? 예외는 있지만-오설영은 리서치 위주이긴 하지만 아카이브 플랫폼에 해당하는 작업- 작년과 달리 리서치를 한층 접은 안무랩 (물론 두 번째 프로그램의) 작업들은 춤에 대한 메타 비평을 플레이했지만 그다지 풍부하거나 앞서가진 못했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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