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6.04.29 13:04

▲ <시간의 나이>[사진 제공=국립극장](이하 상동)

공연은 호세 몽탈보의 시선과 몸이 겹쳐져 있다. 이는 국립무용단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로부터 포착된, 그리고 몽탈보의 움직임을 무용수들이 전유한, 두 가지 결은 시선의 층위를 각각 몽탈보와 관객으로 달리 분배한다. 그 결과 몽탈보의 시선에 딸려 들어갔다가(소환됐다가) 몽탈보가 머금지 못한 (몽탈보로부터 비껴난) 시선의 나머지를 보게 된다. 이런 측면으로 인한 문화 차이의 간극은 어색한 옷을 입은 것 같다는 느낌을 언뜻 주는 일면이 있다(어떻게 우린 몽탈보를 통과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이 관문을 몽탈보는 통과할 것인가의 물음을 낳는다).

여기에 영상과 음악이란 레이어는 움직임을 이미 선취하거나 다른 차원에서 개입한다. 가령 대도시의 삶을 떼를 지은 새들의 모습에 오버래핑시킴과 전통춤을 앞뒤로 배치하며 시간의 구김을 이미지 병치로 풀어낸 뒤, 바닷가나 쓰레기장 등 거대한 환경 아래 이동 이후, 볼레로라는 음악의 사용을 각각 1, 2, 3장으로 나눠본다면, 1장에서 두드러진 매우 느린 움직임으로 처리되는, 곧 몽탈보의 시선으로 전유된 예컨대 호흡이나 유려한 선의 움직임이 아닌 느림-속도의 이미지는 바닷가를 유장하게 흘러가는 카메라의 느린 편집 지점이 실린 2장의 영상의 관점에서 (이미) 재편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는 3장의 볼레로 음악에 침잠되는/죽어 있는 움직임으로 이는 연장된다.

"Look at me"라고 그러한 더딘 움직임 앞에 소리치는 이의 소리는 잉여로, 그 자신에게로 튕겨져 나온다. 움직임의 대비를 주는 안무는 해소되지 않는 소통의 내용과 그리고 겨우 3장에서 봉합되는 볼레로의 하강됨과 돌연한 솟구침에서 형식적 차원으로 해소시킨다. 그리고 이를 몽탈보의 관찰자의 시점 자체가 하나의 절박한 유머 차원으로 승화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곧 저 '유장한 선'의 흐름에 제어되지 않는 남자의 움직임의 극명한 대비 점은 사실상 시선이 투과되지 않는 저 단단한 신체의 전통에 대한 몽탈보의 외침 자체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여기 몸이 있다!'는 발화의 다른 그러나 같은 버전이다, 여기 몸이 있음을 알림이 소용없는 시점에서. 이는 현대인의 고독한 양상을 전경화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새들의 뒤뚱거림의 양상 그 자체를 체현하고 있는 움직임이었음이 뒤늦게 드러나기도 한다. 또는 영상이란 침범되지 않는, 그러나 몸에 개입하는 하나의 몸 자체로서 영상 또는 영상의 편집적 시각과 흐름이 안무를 재편한다.

1장에서 몽탈보는 우리 춤을 속도라는 관점에서 재편한다. 가령 우리 몸짓들을 몇 배 속으로 감는다. 부채가 펼쳐지는 순간의 어떤 여유를 남기는 제스처의 연장됨은 금방 빠르게 넘어가는 대신, 그것을 하나의 박자로 쪼개 빠르게 '포착'한다. 이는 뒤이은 플라멩코의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손동작이나 박수의 맥락으로 소환(되며 잉여로 실리게)된다. 곧 이는 안무를 위한 필연적 재단으로, 오독과 불이해에 따른 결과라고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전통 춤은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실은 다른 이미지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재편에 걸리지 않는 부분이 우리 몸에서 감각적으로 체현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몽탈보에게 낯설기에 새로운 것이었던 것의 익숙함을, 몽탈보의 무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안무는 영상과 맞물리는, 교호하는 움직임을 잇는 솔기의 형태를 띠고 또는 영상 자체로서 체현된 몸이라는 관점 아래 움직임을 앞뒤로 이중적으로 교차 배치한다. 그런 지점에서 1장의 배경-영상 차원의 말없는 움직임과 과잉의 목소리, 2장의 영상에 듬성듬성 자리하는 군중과 앞뒤로 병치된 한 인물의 다른 모습 둘의 동기화, 3장의 볼레로의 지지부진함과 어떤 도약의 대비는 고정된 것과 그것을 찢고 나오는 것, 또는 끊임없이 자리하는 것과 우발적인 무엇으로 이뤄지게 된다. 달려 나가는 장면을 다시 거꾸로 감아 비사실적 리얼을 보여주거나 수영장에 인파가 파도에 감겨 굴곡을 이루며 이동할 때의 흥분, 달려가며 포옹할 때 그 속도가 상대의 품에서 속도의 더딤을 에너지의 비가시적 증폭으로 구겨 넣는 식의 영상의 독특한 지점은 안무의 또 다른 차원이다. 그 앞에서의 춤은 의외로 약동하는데, 죽어있음을 깨운다고 할까. 거대한 이미지의 생명력 아래 미시적 움직임은 그것을 체현하며 동시에 포획돼 하나의 구문으로 병치된다고 할까. 다시/비로소 생명력을 얻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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