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6.04.29 12:43

크리에이티브 바키, 대화의 기술/정치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라고 했다. 이는 <그녀를 말해요>에서는 윤리적 심급으로 적용된다. 배우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보고 들으며 그들을 우선적으로 연극적으로 '체현'하는 한편, 죽은 아이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그들의 말이 아닌, 유가족을 통과한 목소리에 '접근'해 간다. 처음에 유가족에게 던진 다양한 질문을 답변에 대한 시간 없이 계속 이어 붙이는 장면은 유가족에게는 대단히 폭력적이고 무식한 행동인 듯 드러난다, 그들이 경황이 없는 가운데 그러한 생각을 종용하는 것과 같은. 

 

▲ <그녀를 말해요> 공연 사진[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이하 상동)

마치 세월호 유가족을 연극을 위한 소재적 착취로 가져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 행동 이후, 곧 이어 장수진 배우가 말은 대화를 전제로 성립한다는 사실로, 말을 연대적인 측면으로 '한정'해 정의 내린다(가령 말은 상대방을 가정하지 않고 성립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로부터 듣고 서로에게 말해야 한다는. 그리고 이 보기와 듣기의 동시적인 작용은 인터뷰어로서의 그들의 말이 유가족의 입장을 체현하는 인터뷰이로서의 우리 자신에게 다가옴으로 인한 당혹감을 어느 정도 설명한다. 이는 유가족의 말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으로 (우리) 스스로가 위치해야 했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듣기와 보기의 함께함은 일종의 대화의 정치학이란 새로운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매우 단순하게도 유가족을 극장에 올리지 않는 대신, 그들과 함께 있었던 배우라는 매체가 상대방을 전제함으로써 성립한다.

여기서 배우가 자신의 몸을 듣는 이로서 내어주고, 그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최소한도로 전달하는 방식은 일견 배우를 또 그들의 말을 감추며 그들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은 그 말에 또 말을 하는 이에 어떻게 최대한 근접하게 접근하느냐의 측면에 대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연기술의 부분이며, 거기에는 매체에 대한 성찰이 가로 놓인다. 곧 이들은 이미 죽음으로써 말할 수 없는 이들을 둘러싸고, 철저한 듣는 이로서 입장을 고수하며 이 말을 어떻게 다시 옮길 것이냐에 승부를 걸며, '말'이 가진 가능성을 새롭게 타진한다. 이는 희곡을 말로 옮기는 과정이 아니라 아마도 말의 즉자적 전달 가능성이라는 과제로 실천된다.

이는 자신을 텅 빈 매체(인터뷰어)로 체현하는 가운데 말하기가 아닌 (보기와) 듣기만을 가동하는 듯 감각되고, 그들은 단지 들은 말을 전하는 매체로서만 무대에 다시 자리함으로써 윤리적 측면에서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려는 듯 보인다. 그런 듣기(와 보기를 통한 말하기), 말에 대한 집착 어린 의지는, 말이 현존을 담지할 수 있음을, 현존에 다가갈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듯하다. 곧 배우로서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유가족의 말에 근접해 갈 때 죽은 이의 현존이 체현된다는 것이다.

공연을 보는 내내 우린 죽은 이의 현존이 가시화되는 몇몇 장면을 계속 포착하게 되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대, 곧 과거에의 붙들림으로 계속 드러난다. 사실 장수진 배우가 상호 간의 대화라는 말의 정의 너머, 유가족의 말이 자신을 통과해 저 너머를 향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할 때, 이는 말에 대한 한정적 접근에 대한 정의에 예외를 설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은 이라는 제3자를 가정할 수 있음을 넌지시 설파한 것에 가깝지 않을까.

말을 통한 현존의 가시화는, 실제 찬란한 햇빛 아래 밝아지듯 다가오는 죽은 이들의 학창시절 찍은 것이라 자연 생각이 들게 하는 어떤 음성들이 여러 차례 무대 중간에 개입하는데, 이런 '기계장치의 영혼'은 한동안 영화 '사랑과 영혼'의 테마송이 터져 나오며 만질 수 있는 영혼으로 그들을 자리 시키는 데서 어떤 신비주의 성격의 오류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시종일관 무대에서 마치 죽은 이들을 살아 있는 듯하며, 그들을 유가족의 기억을 무대에서 배우라는 매체로 되살림으로써 끊임없이 행복했던, 그들의 생전으로 돌아간다. 마치 슬픔과 절망으로만 쓰일 것 같은 유가족의 기억엔 여전히 행복한 추억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건 뜻밖의 소득이다. 그들의 죽음은 참혹한 것일지언정 그들의 삶은 그렇게 찬란했었다는 걸 기억하는 건, 이들의 듣기와 보기를 통한 실질적인 소득일 것이다.

결국 다큐멘터리처럼 사실들을 좇아간다거나 정치에 대한 발언을 한다거나 하는 것을 제하고 말이라는 것의 전달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그녀를 말해요>는, 연극이란 매체로써 정치적인 행위를 할 수 있음의 가능성을 타진하려했기보다는 그 매체 자체의 전달 가능성을 실험했다는 점에서, 연극(적)이다. 그 말이 깨우는 기억과 이미지의 회로가 잠시 이끄는 환상이 현실에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원에서 깨지는 부분이 곧 배우들이 잠시 말을 거두거나 일종의 묵념을 행하는 사태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말로써 되살리며 죽은 이들에 접근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의 드러나지 않는 신념에 동조하며 죽은 이의 현존에 다가서고 곧 다시 그들의 죽음, 닿을 수 없음, 말할 수 없음을 체감하고 하는 반복을 수차례 하며 소진되어 간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그녀를 말했어야 했을까. 직접적인 정치로부터 우회하며 일단 유가족이 가진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좇아나가는 과정을 밟아나가며 그들의 현존을 다시 가시화했어야 했을까. 그건 매력적인 부분인 동시에 이 극 스스로가 해명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암장된다. 마지막에 성수연 배우는 세월호 탑승자 중 죽은 이의 이름들을 단원고 학생들의 반 순서, 가나다순으로 부르기 시작하는데, 암기가 일시적으로 흐트러지는 것 같은 힘에 부치는 모습에서 관객은 간절히 그것이 끊임없이 온전하게 완성됐음의 감정에서 그 행위에 공모하게 된다.

속옷만 입고 하나둘씩 무대에서 천천히 뒹굴기 시작하는 배우들은 배에 갇혀 파도에 휩쓸러 가고 있는 이들을 가정하게 한다. 한편, 유가족의 현존을, 죽은 이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전반적인 과정에 비해 사실 자의적인 이름들의 나열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름)들이며 실제 불리지 않는 이(름)들이라는 점에서 한 명도 빠짐없이 불리어야 함의 윤리적 과제로서 수행되지만, 그것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결국 앞서 체현의 정치이자 매체로서 표현 양식을 제시했던 앞선 시간과 그것이 매우 대별적으로 구현(분리)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달콤했던 기억들 너머 죽음 자체를 명백하게 가시화하는 작업은 앞선 침묵/묵념의 실천의 완전한/명백한 구현이며 결국 가장 정치적이면서 시대적인 과제의 무대에서의 직접적인 실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장 자체가 결국 왜 그녀를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물음을 갖지 못한 채, 시대가 요청하는 부름에 너무 쉽게 흡착되고 만 궁색한 해답의 제시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상 그 많은 죽음의 일면만을 다룬 이 극이 결국 그 모두의 죽음을 제시/대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또 사실 죽은 이의 말 자체를 드러낼 수 없다는 점에서 너무 쉽게 이름의 나열로 그 총체를 다룰 수 없음의 간극을 메우고자 했던 것 아닐까.

하지만 크리에이티브 바키가 보여준 것처럼 매우 일부의 말을 유심히 듣고 다시 전하는 것만으로 충만했던 연극은 다른 현존의 가시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데서, 또 연극이라는 다른 전달의 방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획득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애도의 의지가, 정치적 발언으로서 명명의 의무로부터 짐짓 거리를 두고 일관된 기조로 연극을 만들지 못한 지점에서 지루함을 선사한다. 그것은 한 명에 대한 듣기(와 그를 통한 보기)로써 그들을 체현코자 했던 앞의 세세한 접근의 시도에 대한 너른 공명의 시도로의 변칙적 전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사람의 이름은 한 사람의 생명의 실제 값으로 치환된다. 그것은 차라리 감당해야 하고 버텨야 되는 몫이다. 거기에는 달콤한 기억도 그와의 어떤 추억에 대한 공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자의적인 이름들의 나열은 세월호에서 부당하게 죽은 이의 몫이라는 전제에서 정치적이기보다(그러나 정치적으로 보이며/착각하게 하며) 제의적인 절차, 그러나 그다지 입체적이지 않은 평면적인 전개로 제시된다.

이 작품은 소수의 죽음에 대한 소소한 방식의 밀도 있는 접근이 가진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며, 대의를 수호하(려)는 식의 방향 전환은 사실상 무리였다고 생각이 된다. 그렇지만 이는 낭독이나 (동시적으로 펼쳐졌던) 자막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성수연의 흔들림 없는 기조, 그럼에도 흔들리는 인간적 표지는 곧 배우의 말은 완전한 암기의 훈련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대신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연극의 경계에 가로 놓이게 한다. 곧 성수연의 찡긋거림의 표정, 어떤 침묵은 윤리적 당위가 배우의 당연한 과제로 수행되는 가운데, 애도의 감정과 윤리적 의무, 배우의 기술로서의 중첩된 감각의 혼재 속에서 발현된다. 여기에 연극의 현실의 경계가 있고, 말하자면 이것이 올바른 것이고 응당 그러해야 한다는 공통의 의식이 은폐하는 지점에서의 균열이 있다. 결국 304명의 이름이라는 '말'을 넘어 그것을 발언하는 가운데의 어떤 침묵을 보아야 하는 이유다.

그러니 우린 배우들이 앞서 말했듯 말을 하는 이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그들을 찬찬히 세세하게 응시(하며 오히려 배우를, 성수연이라는 낭독하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 오로지 배우로서. 이것은 그러니 연극이다. 결국 그러한 명명의 정치는 연극이라는 배우라는 매체의 존재 양식을 실천하며 실험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연극(적)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은 모두를 대변하는 데 실패하고 사실상 죽은 이,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이로서 사람들의 현존을 가시화하지만, 다시 죽음이라는 명백한 현실(의 과제)로 돌아오며, 빠르게/급격하게 현실로 복귀한다.

곧 그들 스스로가 침잠됐던 판타지 자체에 대한 비판이 제시되기보다 그 판타지의 흔적을 급격히 지우며 연극을 마무리한다. 그들이 그녀를 말하는 가운데, 그녀를 말하는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결과다. 아니 그 망각을 통해서만 애도가 가능하다는 걸 관객과 공모하며 펼쳐냈기 때문이 아닐까. 입체적인 복원과 정치적인 호명 사이의 간극에 위치한 이 연극은,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다는 윤리적 사명 아래 사실상 그녀를 말하는 그녀를 투명한 매체로 만드는 가운데 작동하고, 이후 정치의 대표적 자리를 이름에 대한 기억의 ‘강제’를 통해 구현한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그녀를 말해요>는 현실의 사안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보다 ‘무엇’을 다룰 것인가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스스로의 자리에 대한 윤리의 고민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자리하는 것으로 ‘대화’라는 소통의 결이 담보됐을 때를 전제하는 것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상정된다. 그래서 재현에 대해서 어떤 거리를 형성하기보다 그 거리를 너무 쉽게 삭제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재현과 정치, 애도와 제의가 뒤섞이는 장에서, 우리는 아직 세월호라는 배에 여전히 탑승 중인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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