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6.01.10 14:46


▲ <프로메테우스> 공연 모습 [사진 제공=산울림소극장] (이하 상동)


이 극에는 두 가지 응결 지점이 있다. '힘과 폭력의 시대에 미래의 정의가 그것을 심판할 것이다' 하고 곧 이어 등장하는 '이 모두는 흙으로 뒤덮이게 될 것'. 전자가 지금 현 시대를 반영하며 그에 대한 무력함을 은폐하고 저항의 기치를 올리며 쾌락을 관객에게 수여하는 전언 형식의 너무 가까운 말이라면, 후자는 모든 존재를 필멸의 삶으로 바꾸는 불멸의 역사라는 존재에 맹목의 심판을 유예하는 너무 먼 말이다. 역사라는 평평한 땅에서 모두는 평등한 이름으로 묻힐(호출될) 것이라는 이상은 (민중을 가로지르는) 정의의 심판론보다는 오히려 더 낭만적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프로메테우스의 본질적 존재론이 자리한다. 곧 그는 역사에의 어떤 의지 그 자체다. 순간(현재)을 영원(역사)으로 쌓는 프로메테우스는 타자로서 불리는 이름이다. 곧 불리며 그 단단함을 쌓고 거리를 형성하며 반대로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애쓰게 되는 이름이다. 그것은 하나의 형벌이자 이상인 말이다.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의) 이름이다. 


오케아노스 역의 배우는 고개를 다소 밑으로 내리고 발성한다. 반면 헤르메스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말한다. 헤파이스토스는 오직 정면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진보와 보수, 증인으로 쉬이 갈음되는 이 세 역할은 각각 고개를 내린 만큼 눈을 크게 뜨고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응분을 섞거나, 가치나 타자에 대한 측면을 철저히 괄호치고 논리적인 것들만으로만 논변하거나, 오직 진실만을, 그 진실의 목소리에 스스로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보여준다. 실제 한 다리를 저는 몸 상태이기도 하지만, 프로메테우스가 담은 진실이 훼손됨에 감정/몸을 기울이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편이다. 



현실의 정치극을 패러디/풍자한 이 극은 원작이 갖는 비극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하는 대신 그것을 현실에 접합시키기 위해 문자투표 200원의 유머를 간간이 선택한다. 그러한 인위적 유머는 일종의 큐를 달리 둘 때 얻어지는 것이지만, 프로메테우스의 숭고한 의의에 대한 담론을 쌓는 과정과는 충돌하지 않는 듯 보인다. 곧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중계되는 국회라는 하나의 콘텐츠로, 주석으로 바꿔 버리고자 하는 가운데, 고전에 대한 헐거운 포기/기각이 일어난다. 일부러 (고전의) 엄숙함으로 모두 봉합하지 않는, 또 다른 시선의 접합은 고전에 대한 재해석이라기보다는 현대와의 병치를 통한 현재를 반영하며 거기에 모든 걸 예속시키는(/예속시킬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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