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5.09.13 03:20

[사진 제공=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전미래 작가가 안무한 퍼포먼스는 해골들이 엮여 만다라 기호를 이루는 거대한 벽면(의 그림) 앞에서 이뤄진다. 검은색과 흰색의 남녀 무용수는 접합되지 않고 균열을 일으킨다. 숨소리가 거칠게 상승하며 파열적 양상으로 확장될 때 결정적으로 남자의 입 꼬리를 타고 오르는 희열의 웃음은 악마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이 의식적이라면 반면 여자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자신을 끊임없이 삼키려 하는 어둠으로부터 침범되지 않고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그저 무감한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러한 무지의 무의식은 부처의 정자세를 취함으로 자연 돌아간다는 점에서 속에 대비되는 성聖의 도상이 된다.

 

전미래 작가는 그 둘을 둘러싸고 한 박자에 가볍게 손뼉을 한 박자에 한 발을 내딛는 식으로, 한결 나아감(걸음)과 덧없는 일어남(박수)으로 안의 혼란스런 세계 양상을 두 가지 몸짓 기호로 은유하며, 세상의 질서를 순환적인 대칭 구도 아래 포박해 둔다. 이러한 관찰자의 시선이 안과 밖이 전복된 질서로 수여될 때 곧 그 카오스적 원환에서 경계를 풀어버릴 때는 그러한 퍼포먼스가 숨을 닫는 순간인데, 남자의 온 몸이 탈골되는 듯한 움직임은 스트리트 아트의 소위 각기라는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정면의 해골 기표에 상응하는 움직임에 부합된다. 벽으로까지 밀려 나가는 움직임에서 중심을 굳건히 지키는 텅 빈 김혜경의 시선 없는 몸의 의식이 전미래 작가로 옮겨갈 때 작가는 시선을 잃고 흰색 밀가루를 얼굴에 뿌려 그것에 샤워를 하듯 그 작게 이는 바람으로부터 흩날리는 듯 청량감을 안긴다. 퍼포먼스가 끝났을 때 밀가루의 궤적이 투명한 섬의 다양한 패턴으로 남았고, 거울과 조명이 전시장에 들어서 의식儀式적 풍광을 만들고 있었다.

 

사실 검은 그림자를 남기는 흰 해골들의 조합된 도상은 미술관의 높은 벽을 모두 덮는다는 점에서 거대하면서 새삼 연약한 결합의 무너져 내릴 듯한 아찔함의 입체감을 수여했는데, 이는 도형들의 유기적이고 정확한 각도의 결합이 갖는 단단함과는 왠지 거리가 있었다. 그러한 해골이라는 소멸 자체의 명징한 기호의 유기적인 결합에 부여한 틈에 대한 환각은 소멸된다는 동사의 측면으로 이 그림을 다시 바라보게 했다. 그러한 휩쓸려 가는 이 그림의 거대하지만 그럼에도 미약하고 위태롭게 보이게 된 이유는 이것이 마치 휩쓸리듯 또는 밀가루와 같이 흩어지듯 산포하는 드로잉의 결이 그림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앞서 두 사람이 접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치 그림자의 어둠으로의 틈입 지점을 낳는 동시에 흰 빛이 밀가루처럼 흩날리는 에너지의 역동적인 장을 형성하는 측면에서 실은 이분법적 식별 자체에 대한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그림을 볼 때는 급격하게 무질서한 자국들의 뒤엉킴으로 드러났다. 곧 그림 역시 현장의 안무 이전에 안무적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 만두피와 같은 하얀 싸개는 폭신 관람자를 안기게 할 것이다. 아마 그러한 측면은 싸개에 휩싸이고 싶은 어포던스적 충동에서부터 유도되는 것일 테지만, 실은 그다지 폭신하지는 않았다. 심미적 기호의 도상보다는 동사로서의 성격이 짙은 드로잉에서 기괴한 장소 특정적 아우라 대신에 굴러다니는 돌과 같이 붙박이지 않고 애매하게 배치된(그것을 감상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앉는 순간 흔들리게 된다. 그것은 다음 방으로 넘어갔을 때에 비로소 의자의 기능으로 온전히 돌아서게 된다.), 관객 참여형 사물로서의 오브제는 고추를 엮은 동아줄로 경계를 그어놓은 인류지적 표현의 장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마치 잘린 필름과 같은 은빛 매체의 구부러짐은 무시간과 그것의 물질성을 하나의 에너지 차원에서만 보여준다.

 

고추는 옆 캡션, 곧 전시 설명을 참조하자면 발효의 미학과 연관 지어 바라보게끔 되어 있었으나 실은 하나의 재현적 장이 만드는 인공적 아우라의 어떤 기괴함(가령 고추의 색은 원래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인위적이다. 동시에 은빛은 꼬부라지며 팔루스적 생명력을 잃은 듯하지만 그 빛은 고추와 연관되어 죽지 않고 연장된다.) 따위와 맞물려, 하나의 관찰자적으로 그 아우라를 경계에서 접하고 체험하는 데 머무르게 했다고 보인다. 곧 인류지적 타자의 질서. 이것은 그림과 퍼포먼스가 서로를 풍부하게 되살리는 체험을 줬던 것처럼, 어쩌면 퍼포먼스와 함계 비로소 완성되는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암묵적 죽음의 장인지도 모르겠다.

 

퍼포먼스를 제 일축에 두는 작가의 경우, 동역학적 순간의 결과물을 어쩔 수 없이 전시가 갖는 정적인 도상에 대한 심미적 분별과 그에 대한 완성도의 측면으로 어느 정도 전환해야 할 때 퍼포먼스의 멈춤, 부재의 측면을 어떤 식으로 다른 관람의 방식으로 전환해 전시 내내 이끌어낼 것이냐의 측면인 것으로 보인다. 전미래 작가의 경우, 그간 주로 전시에 틈입하며 소멸하는 전시의 측면을 완성하는 식으로 위치해 왔다면, 이번에는 회화, 영상, 설치 등 다양한 형식으로 체험의 장을 만들고자 하며 자신의 개인전을 엮어 나간다. 이는 제각각 모두 달라 하나의 일관성 있는 엮임을 만들진 않는다. 마치 흩날리며 그래도 연결을 파기하지는 않는 밀가루와 그로써 다시 환유되는 흰 해골의 먼지 같은 소멸로의 견고성이 불안하게 관객을 감싸는 것과 같이, 만두 피 같은 싸개가 이상하게 전시장 사이를 틈입하는 것과 같이, 또는 고추 엮음의 장 안에 이상한 빛의 필름과 같이 이중적인 모호한 도상들이 의미의 파악과 해석을 기다린다고 보인다.

 

물론 아직으로선 명확하게 풀리진 않는다. 이는 상징 지형으로서 함축된 의미들이 메타 레이어로서 전시를 지시하는 현실적 언어들과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하얀 실재감의 빛으로 바꾸는 퍼포먼스, 그리고 편안하면서 두드러져 관객의 몸에 침범하는 (게다가 딱딱하기도 한) 오브제, 죽은 빛과 같은 이상한 시간성을 지닌 필름 오브제 등은 결코 명확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호로서 남는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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