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5.07.27 16:30


▲ <안전가족> 포스터


<안전가족>에서 ‘안전가족’은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사용된다. 가족이 사는 집이 안전한 만큼 바깥은 불안전함을 시사하고, 그러한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서는 바깥에 나가면 안 된다(는 신화를 구성한다). 단지 가장만이 외부 출입을 할 수 있으며 나머지 가족은 그 선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이 가족은 가부장적 위계에 의해 집에서 엄금된다. 밖은 불안전한 것일까. 바깥과 단절됨으로써 언어는 해체·재조립되고 사회의 언어 규약을 따르지 않게 된다. 


애초 아이들은 라디오(미디어)를 통해 이상한 언어의 쓰임을 하달 받고 있는데, 우리가 아는 일상 언어에서의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가 전제된다. 가령 ‘오토바이=박수’라는 식으로, 바깥과의 관계 맺기가 부족한 가운데 외부의 생명체로서 고양이 역시 핵폭탄이 된다. 하지만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로 다의적인 언어의 특질을 드러내는 것으로 확장된 언어의 쓰임을 갖기보다는, 단지 기존 언어가 뒤바뀐 형태를 구현하는 언어 놀이로서 실질적으로 이질적인 공명의 효과를 관객에게 전한다. 그리고 이는 북한 사회의 폐쇄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모습을 풍자하는 데 더 가까워 보인다. 


반면 바깥은 라디오-아버지에 의해 부정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주입되는데, 고양이가 핵폭탄이라는 언어 사용은 고양이는 핵폭탄 정도로 위력적인 무엇이라기보다 일종의 신화가 전제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며, 나아가 관객에게 한편으로는 전치된 의미의 강력한 의미의 고양이와 사실 그렇지 않은 희극적 효과의 두 가지 측면을 중첩시키는, 실은 극의 메타 언어적 사용에 의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와 같은 희극의 전략은 핵폭탄만큼 무서운 외부의 것으로서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 정도만큼만 무서운 핵폭탄이 된다. 그렇다면 실제 핵폭탄의 기의를 가리킬 기표는 무엇인가, 고양이인가, 아니면 더 무서운 무엇이 있는가. 


‘핵폭탄=고양이’의 교환 사용에 의하면 실제 이 가족들에게 ‘고양이’라는 기표는, ‘핵폭탄’이라는 기의는 없는 셈이다. 또는 다른 단어이거나. 하지만 이러한 언어 사용이 풍부한 그 자체의 자족적 언어를 이루기보다는 여러 매우 계산된 쓰임만을 실천하고 있다고 보면 (실제 모든 단어가 바뀐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이 노리는 언어의 전복적, 전치된 사용은 일종의 교육·지시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의 우스꽝스러움보다 낯섦, 나아가 이들 가족이 외부에서 오는 모든 것을 부정적이고 그만큼 커다란 것으로 취급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결과적으로 핵폭탄만큼 이질적이고 무서운 고양이와 같이, 실은 전쟁과 폐허의 이미지가 일상으로 소급되어 일반화되며 평이하게 된 시기, 곧 일상화된 전쟁 안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식의 언어 사용이라 할 것이다. 


<안전가족>은 모의 섹스 훈련을 외부에서 전달받아 실천하며 마치 게임의 레벨 업 같은 기계적이고 등급화된 규율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그럼으로써 매우 인위적으로 구현하며, 드러나는 이상한 생명력의 기계 시스템 자체를 열어젖힌다. 어둠의 마수로 선 지도자의 한 계열에서 이들은 직접적 연결이 없지만 분명 그것은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이들을 감금하고 또 그렇게 자연 전이되어 감금된 상태로 자신들을 보호하며 스스로의 담 안에서 살아간다. 아버지의 쉬쉬하며 다잡기만 하는 권력의 꿍꿍이는, 저 어두운 지도자의 현현과 결부되며, 사실 중첩되어 일상 놀이의 규율을 그 나머지는 진실로 믿고 실천해 나간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연극이라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고-그래서 모든 것은 기괴하면서 한편으로 자연스럽다- 가장되고도 진지한 연극 놀이가 펼쳐지고 있음을 관객은 목격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이는 미래의 폐허가 아닌 과거의 어느 한 시대의 재현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데,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서의 우유 배달 오토바이를 탄 가장의 출근 모습이나 컴퓨터가 아닌 라디오를 통해,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 언어의 초입 단계에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 또 공중을 떠도는 전투기, 무엇보다 가상화된 북한을 떠올리게 하는 규율 등 차라리 6.25 전쟁의 외상의 시점을 복원한 것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이다. 한편 이는 가족제도와 사회제도 자체를 뒤집어 보여주는 것이라는 보편적 성찰의 지점을 넘지 못하고 그것을 특수화시키는 우리나라만의 특정 시기를 연상시키는 어떤 맥락에서 붙잡히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는 현재보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하나의 계보적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현실을 조각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작품의 비판은 하나의 냉소에 불과할 수 있지 않을까.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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