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5.04.14 13:52

언어-움직임-이미지의 균열적 총체

국립현대무용단 끝-레지던시 공연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

‘짏어’는 ‘싫어’와 ‘질어’(‘짊어’/‘집어’……) 등의 무수한 유사 기표의 착시를 ‘짊어’진다. 이것은 그 어떤 확정/이해 가능한, 단어를 거부(‘싫어’)하며 그것을 포섭한다. 독립적인 단어의 쓰임을 이탈하는 초과된 단어의 전시는 말을, 침묵을 대신한다. 말의 침묵은 침묵으로서 말하기가 된다. 무대의 현존은 그러나 그 앙다문 그러나 비죽 나온 두꺼운 입술에, 그 입술이 지니는 묘한 웃음의 흔적으로 수렴된다. 곧 눈과 입의 다른 층위에서 이 작품은 어쩌면 전적으로 쓰이고 있다. 곧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의 간극이 이 작품을 추동한다.

이 기묘한 마스크의 무용수, 최민선이 갖는 침묵의 말은, 각각의 무용수들을 말하는 오브제, 현존하는 자동 기계로 둠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이어 최민선은 꺾인 몸의 포즈로 몸을 사물로서 구겨 버린다. 이것은 나중에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구현된다. 두 번째 등장한 또 다른 무용수 강진안이 숨을 둠으로써 그 간극을 채우며 적극적인 듣기, 그러나 온전하지 않은 말의 완성을 추동한다.

세 번째 장홍석은 암기된 지시문을 낭독하며 움직임을 끼워 넣는다. 움직임 역시 하나의 언어의 조각, 그것이 구문의 부분이라는 점에서, 곧 이중의 언어라는 점에서 언어와 동기화되거나 곧 언어의 또 다른 언어적 출구를 만들기도 한다. 이 셋은 침묵의 말, 간극의 말에서 입체적인 말로, 스스로에게 생명을 불어넣는-애니메이트된 오브제로 말하기 시작한다. 영화적 장면을 비스듬한 각도들의 총체로 구성해, 시차적인 단편들의 호흡으로 알 수 없는 시·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이야기가 되지 않는 장면이 재현되고 있음, 그 작위성이 몸과 말에서 계속 옮겨 감으로 인해 어떠한 이야기는 명확한 잔상들의 연결로만 구축되고 있다. 이것은 사라지면서 남는, 곧 애초에 잔상인 것이다.

낭만주의적 실존주의

각자의 시선/몸이 가진 장소는 각자의 층위로, 현재를,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것이 동시적인 것은 이 모두가 알 수 없는 하나의 캐릭터로, 주체로 섬을 의미한다. 소외된, 소외됨의 출현을 갖는 시선이 있다. 소외의 극장 안에 펼쳐져 관객에게 인도된다. <17cm>는 ‘거리distance’, 그리고 ‘소외’ 나아가 소외가 거리를 채우는 이야기다.

임지애 안무가가 무용수들에게서 침묵을 듣고 이를 간극의 말로 들었다면, 윤푸름 안무가는 침묵을 보고 그 침묵에 무용수들을 가둬뒀다. 무용수들은 그 침묵을 안고, 침묵이 된다. 침묵은 연기자의, 나아가 소외의 극장을 소외의 카니발로 방향을 튼다. 임지애가 다중 장면을 하나의 시간으로 쌓는다면, 윤푸름은 여러 개의 시간을 하나의 몸으로 우겨 넣는다.

17cm 이내의 가까운 시선/몸은 동시적 장면으로, 각자의 시간들이 하나의 작품 안에 만들어진다. 탱고의 거대하고도 빠른 스텝은 극장을 누비며 어긋나면 동시에 한 단위로 거대한 몸의 노님으로 구축된다.

<어제 보자>가 춤의 균열을 통한 안무 자체에 대한 물음을 갖는다면, <17cm>는 극단적인 가까움으로 나아가, 얼굴/말의 클로즈업으로 연극적 장면들로 그 분위기만을 취하게 한다. 전자가 언어/움직임의 해체로 재안무를 시도한다면, 후자는 낭만주의적 어떤 흐름에서 접속/이탈-무대 전체의 수직 상승/하강을 통해-을 반복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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