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5.02.13 15:33


▲ 디스 디스토피아_사진 김도웅 [사진 제공=컬처버스](이하 상동)


디스 디스토피아(This distopia)는 부정적인 장소, 디스토피아를 지시한다. 이것은 디스토피아라는 프레임은 무대를 구획한다. 곧 디스토피아라는 세계에 침잠·전염되기보다 이러한 디스토피아를 인지하는 주체로서 극을 바라보게 된다. 한편 ‘디스-디스’라는 발음/표기가 반복됨은 일종의 언어유희로 이해·인지 가능하며, 두 개의 ‘디스’가 자리바꿈을 하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this distopia’는 ‘dis-this-topia’로 볼 수 있고, 그에 따르면 이 부정적인 장소는 부정적인 이 장소로 전치되며, 전자가 저기의 부정적인 장소를 바라보는 이곳의 시선이라면, 후자는 여기 장소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디스토피아가 실은 우리 바깥이 아닌 우리 내부의 중핵을 이루는 현재의 장소이며, 일종의 ‘dis-dis-topia’라는 여기의 이중 부정을 통해 긍정의 현재의 장소를 맞는 것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디스 디스토피아의 두 번째 읽힘은 부정·멸망의 서사가 실은 디스토피아의 실재라기보다 우리의 시선 자체와 얽혀 있음을 또는 그 시선 자체에서 디스토피아가 연유함을 가리키며, 어쩌면 저기 있는 디스토피아를 여기로 옮기고 다시 (그것을 실은 만드는) 우리 자신의 시선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장소(topia)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곧 토피아 자체의 되찾음이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이중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적 결말이 아닐까. 


사실상 (영문) 제목에 충실한 극은 이곳이 디스토피아를 가리킨다. 여기서 디스토피아는 토피아를 부정한다. 하얀색 옷을 입은 배우들, 테니스를 치고 탁구를 치는 각각의 1세대와 2세대들은 투쟁의 세대이고, 일견 68운동의 지적 프레임을 그 안에 얹혀 놓지만, 실상 빈공을 휘두름은, 당연한 무대에서의 규칙이자 행위 모사 그 자체로 온전한 재현을 달성하는 관성적 이해에 호소하기보다 말 그대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서 투쟁을 보여주고 있으며, 결국 이곳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며 반복된 빈 서사만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곳은 장소 없음에 가깝다. 그러한 빈 공간을 구축하는 수많은 행위가 조명에 의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디스this는 곧 비춤, 계몽인 것이다. 이러한 빈껍데기의 반복된 장소의 빈 축적을 보라는 것이 연극의 거의 전부를 지배한다. 



이 장소 없음에서 ‘언저리’들은, 이 허공을 휘두르며 투쟁하는, 부정적인 장소 점유의 존재들이 다만 무의미한 반복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에 반해, 수정·착상됐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에 의해 기각 당하며 태어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출현하며 부조리하면서 유일하게 주체의 장소적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곧 장소 자체가 부정되는 디스토피아에서 비가시적인 잠재된 토피아의 경계로서 언저리만이 장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디스토피아가 디스-토피아this-topia가 될 수 있는 문턱에 멈춰 서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 그러나 현재로부터 기각 당하는 이들의 존재야말로 진정 디스-디스-토피아dis-this-topia이다. 이러한 장소의 부정은 다시 부정되어야 한다. 작품은 이 언저리에게서 주체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대신, 그것을 불가능성의 장소로 둔다는 점에서, 절망과 희망의 장소로서 언저리를 지정하는데,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투쟁·혁명이 가능한 다음 세대가 현재의 세대에 가로막혀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곧 이미 지나간, 반복하는 현재 세대의 구성만으로 현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이는 dis-dis-topia로의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디스this 없는 디스토피아인 것인가.


디스토피아 자체의 재현, 그리고 전염. 온갖 부정적인dis, 또는 비춤this!을 통해 부조리를 비추는 작품에서 언저리라는 이름 역시 예사롭지 않은데, 자신의 존재를 기강 당하는 언저리는 또한 un-jury가 아닌가. 곧 배심원단이 아닌, 법 앞에 선 자, 곧 언저리가 번번이 자신의 현재의 자리/장소를 점유할 수 없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장소가 되는 것은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유비를 계속 떠올리게 한다. 사실상 취업을 하지 못하는 잉여 세대의 거대한 취업 문턱을 생명의 유비로 치환한 데는 꽤 위험한 선택이 필요한 듯 보이지만, 동시에 깔끔하게 무대의 비움과 반복만으로 서사적 구축과 장소적 구축 모두를 물리치며 부조리 자체를 상연하지만, 이 작품은 결국 문턱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신학적 유비로 디스토피아를 부정하는 dis-distopia로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dis는 물론 힘이 없다. 이 위험한 디스토피아의 상연과 어렴풋한 부정은 실상 완벽히 이 디스토피아를 비추지 못한다. 사실상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지만. 단순히 이곳을 디스토피아로 규정하고 그것을 (비추지 않고) 부정함은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시각 자체야말로 디스토피아에 대한 이상한 오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것이 이 작품에 대한 매우 이상한, 그러나 처절한 절망일 것이지만, 사실상 법 앞에서가 아닌 또 다른 실재의 축이 있다. 이는 해석보다는 경험의 귀결인데, 지진의 모티브가 겹쳐 있는 것이다. 곧 단순히 부정적 장소에 대한 빈 축적이 아닌 장소 자체가 기각 당하는, 판 자체가 유동하는 장면을, 물론 위에 달린 조명들이 떨리는 장면으로 드러낸다. 이는 곧 전복과 혁명의 판의 가능성을 가정하는데, 디스토피아는 이로써 부조리의 프레임 안을 벗어나 실재로 출현한다. 이는 한편 대재앙의 실제적 국면의 68운동 이후의 역사적 사실을 기입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또 하나의, 그리고 여전한 디스토피아의 지시, 곧 충실한 제목의 해석으로 돌아온다. 그럼에도 이러한 역사를 더함 자체가, 일종의 트라우마를 재현할 뿐만 아니라 디스토피아를 다시 지정하는 데 그친다는 점에서 이는 꽤 모호한 삽입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이는 언저리의 틈입을 허락하는가 또는 부정적 장소를 완전히 갈아엎는 것인가(이를 희망이라 말할 수 있는가의 물음은 유예하고라도). 파국은 상연되지만 곧 지나간다. 곧 디스this/dis 없는 디스토피아의 귀결.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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