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5.01.05 14:25











▲ 국립현대무용단, <춤이 말하다>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춤이 말하다>는 춤을 보는 것에서 춤의 말을 듣는 것으로 춤의 위치 전환을 감행한다. 그러나 렉처 퍼포먼스의 형식을 차용한 이 작품이 제목에서 가리키는, 이 위치 전환은 추상적이고 비언어적 춤에 대한 구체적이고 언어적인 해설/해석의 차원이 더해지는 것만을 이야기하진 않는데, 말하는 주체를 춤에 관련된 누군가가 아닌, 춤 그 자체로 본질적이고 환원적인 차원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곧 ‘춤을 말하다’의 메타 차원이 아닌, 곧 말 자체의 자율성을 가져가기보다, ‘춤이 말하다’라는 그 춤 자체의 신비주의 강령을 온전히 해체/재구성하기보다 춤 그것의 본질에 다시 사로잡힐 공산이 큰 것이다. 



여섯 명의 춤꾼/무용가들은 한국무용계를 대표할 만한 다양한 분야에 속한다. 하지만 엄밀히 이는 전적으로 다양하지는 않는데, 30-40대의 젊은 층의 무용가(아주 젊지는 않으나)들이며, 한 명의 ‘한국 무용가’는 한국무용의 전통과 역사 등의 가치를 확보하며 현대 혹은 세계 무용에 기울어진 무게 중심을 간신히 끌어맨다. 사실은 그 가치를 대표하며 스테레오타입을 구성한다. 그 외의 다른 무용가들은 대부분 대중에게 잘 알려진 얼굴 또는 이름으로 한국에서의 무용가 하면 떠오르는-연륜 있는 한국 무용가를 빼고는-무용가들이고, 따라서 일종의 스타급 무용수들이다. 


이러한 국립현대무용단의 의도는 한 마디로, ‘나는 가수다’의 춤 버전으로 대중과의 소통을 꾀하려는 데서 이번 공연을 기획한 것 아닐까 추정케 한다. 그리고 사실 한국무용의 ‘끼워 넣기’는 춤이 말하다의 춤을 한정/제약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춤의 다양성에 대한 비판을 감안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정도로 비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춤’이 말하기보다 춤이라는 대중 심리적으로 쉽게 수용 가능한 ‘무용가들의 스테레오타입’(어쩌면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 가능하다. 다른 수많은 춤 장르와 알려지지 않은 무용가들의 생태계를 도외시했다는 것과 결국 춤이 아닌 춤꾼들의 삶을 신비화하며, 그러한 측면에서 춤에 대한 대중을 구성해 냈다는 것이다)에서 구성한 영역에서의, 일종의 춤이 아닌 춤꾼들에게로 소급되는 춤판에 가까운 것이다. 



말하는 춤이 렉처 퍼포먼스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춤 그 자체의 재현보다 춤에 대한, 춤의 바깥에 대한 이야기들이 되어야 함에도 (안정된) 춤으로부터 나오는 말이라는, 일종의 자신의 춤들을 동반하는 토크 콘서트와도 같은 형태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춤들을 재현하고, 그 어려움이나 얽힌 제반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할 때 무용가들의 마이크는 그들의 숨참을 그대로 매개한다. 이러한 생생함은 무용가의 땀과 신체가 어떻게 다시 매혹적인 기표로 한층 증폭되는지를 드러낸다. 


이미 재현이 돼버린 춤은, 춤의 현재 현시가 아니다. 최고 기관이 예술가들의 예전 모습 그대로로 돌아간 것에 대한 믿음과 함께 그 잔상이 증폭된다. 아마 이번 공연은 관객 수나 그 반응에 있어 나쁘지 않은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사후 평가의 측면에서 긍정의 결과로 쉬이 공유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리허설 때 관람했을 때 각종 방송 카메라들은 스타 무용수를 스타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데 온갖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로 커다란 카메라와 그 현란한 기술이 동원된 적이 있었던가 의문을 표하게 할 정도로. 



각각의 춤들은 각각의 무용수로 소급되며 나중에 한 차례 커튼콜을 하기 전에 섞이는 각자의 다른 춤의 동작을 하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이런 단조로운 판짜기는 각 무용수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식의 기획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가령 차진엽은 그녀 방을 보여주며 자신이 혼자서 추는 춤, 그 분위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그 춤의 무늬가 그녀 삶에 묻어 있다는 어떤 단서들을 얻고 또 그 삶을 무대에서 들여다본다는 데서 흥미로울 수 있으나 가장 자연스런 하지만 할 수 없었던, 춤꾼들의 삶으로 연장되는 춤-이야기는 춤의 재신비화에 가깝다는 점에서, 곧 다시 춤과 삶을 분리한다는 점에서 우려가 되는 부분이었다. 곧 삶을 무대로 박제화하고(‘이것은 삶이다’) 어떤 친밀감에서 도출되는(‘여러분은 현재 제 집에 있습니다’) 대면 가운데, 이곳은 무대/춤이 아니라 그냥 무용가의 사생활, 속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대의 장을 공유하면서 그 바깥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유지하며 보는 게 가능한 관음증자의 시선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차진엽의 안무를 비판할 수 있기보다(이는 그야말로 그녀 삶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나오는 어떤 춤이었다. 또한 안무의 단면이기도 했다.) 각각의 무대들이 갖는 무용수의 신화 구축의 연장선상에서 각 부분들은 온전히 말로 구현되기보다 그 말의 주체인 춤꾼들에게 소급해 관객은 열광하고, 그에 귀 기울여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말들에는 물론 그 말의 빈자리가 없다. 말의 빈자리로서의 춤이 없다. 



분명 대부분의 무용수들에게서 나오는 이 춤의 말에는 어떤 감흥이 발생한다. 과거를 회고하는 시점, 헉헉거리는 춤은 달리/다시 말해 춤의 아카이브의 불가능성, 육체의 노화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헉헉거림의 생생함이 그 숨의 어떤 페티시를 간직하는 것에 가까웠던 것처럼, 최고의 춤꾼들의 지쳐 감을 대상화하며 얻는 건 결국 춤과 멀어지는 육체의 쇠약함, 그 타자성보다는 과거를 한 때의 추억으로,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국립현대무용단에서의 추억으로 함께 아카이브화하는 국립현대무용단만의 어떤 열망이 갖는(그리고 관객에게서 감지되는) 프레임의 근본적 허망함이 그 춤이 갖는 시간의 애잔함을 능가하며, 그에 대한 온전한 감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이 춤이 말하다는 최고의 춤이 될 순간들을 한 무대에서 회고하며 아카이브화-곧 소유하고 역사의 순간으로 기입-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국립현대무용단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아카이브가 갖는 감정, 그 열망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춤이 아니라, 춤을 말하는 모종의 대화가 가능한 ‘빈 무대’를 만들어 ‘나는 춤꾼이다’ 버전의 열광적인 아우라에 도취한 무지한 대중을 구성하기보다, 춤의 바깥에 춤을 세우고 ‘말할 수 없는 춤’이 춤으로서 말하는, 춤의 외부에 대해 말하는 메타 기술적 춤의 빈자리를 만드는 것만이 춤을 (다시)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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