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4.12.22 13:53

‘연기의 바깥’에서의 양말복


▲ 하수민 연출/즉각반응 <GOOD DAY TODAY>, 출연 이영조(사진 왼쪽), 양말복(오른쪽) © 이재훈 [사진 출처=즉각반응 페이스북 페이지](이하 상동) 


<GOOD DAY TODAY(오늘은 좋은 날)>은 배우 양말복이 화자가 되어 ‘양말복’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띤다. 이야기와 실재는 서로를 보증하는 듯하지만 실재한다는 통상의 양말복(의 과거)을 담담하게 서술하며 이야기 속에서 객관화시키는 양말복이라는 배우는 그 이야기에서 허구의 화자로, 파편적 역사의 체험들을 재구성하는 주체로 상정된다. 양말복이 캐릭터로 분함이라는 ‘연기’는 한 인물의 역사로의 편입의 이야기 형식과 구분될 수 없으며 그 ‘형식’을 유지하는 지지물이 된다. 양말복이 ‘양말복’을 이야기하고 그 경험을 입체화하는 방식에서 관객은 그 이야기의 허구성이 자율성을 띤 기호임을 부정하기보다 그 이야기가 양말복의 재체험과 감정을 수반할 만큼 ‘양말복’이란 인물이 얼마나 양말복을 보증하는지를 의문에 부칠 수밖에 없다. 곧 양말복은 배우로서 ‘양말복’을 분리시켜 바깥에서 이야기함 속에서 내부의 어떤 감정이 솟아남이 ‘양말복’에서 즉자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라기보다, 또는 연기의 보증물이라기보다 그것을 연기/이야기하는, 관통하는 양말복에 또 다른 체험의 연기 바깥에서 나오는 것으로 감각되는 것이다. 


가령 이 연기와 이야기, 배우와 인물 사이의 경계선에 선 양말복의 눈물이 어린 것처럼 또렷한 빛나는 눈동자는 이 극이 ‘자신의 바깥에 선’ 양말복의 배우로 버티기이며 흔들리지 않는 신체의 몸짓을 체현하며 어떤 ‘축축한 빛’으로 그 의지를 비집고 거기서 배어난다. 그 이야기가 자신의 몸을 흘러갈 때 그리고 관객과의 대면은 그 모든 이야기를 담지하고 이제 꺼낼 준비를 하되, 먼저 서빙하는 이로서 손님을 맞는 또 다른 역할에 임해 이제 그 이야기를 꺼내고 체험하며 배우가 됨이 곧 손님-관객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지기에 그러한 의지와 감정의 폭이 그 눈동자와 떨리는 말의 연장으로 이어졌던 것 아닐까. 


이동과 구축의 서사



처음 어떤 하나의 ‘사진’을 든 중년의 남자(이영조)는 누워 있다.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무대 중앙에 눕혀 있는 나무로 된 재료 또는 오브제들을 세워서 쌓기 시작한다. 이야기/연기와 쌓기/행위의 두 다른 시간대는 어떤 교통도 없어 보인다. 바깥에서 이야기가 그 행위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양말복’의 허구의 변천사는 이동에 따라 일시적으로 장소성을 띤 빈 공간에서 벌어진다면, 이영조의 구축 행위는 미로와 같은 공간 안에서 그 미로를 완전히 허물지 않은/못 한 채 벌어진다. 일종의 모나드와 같은 나무들의 배열은 실제 목수인 이영조의 머릿속 유형학적 아카이브라 할 수 있지만, 각각의 장소와 사람들을 상정하며 그것들이 하나의 장 안에서 쌓이고 수많은 개인사들을 형성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간혹 그 안에 양말복이 낯설게 들어오며 그 나무들을 건드리지 못한 채 그 바깥에 다시 나가고는 하는데, 이야기의 바깥에서 환영처럼 존재하던 중앙-구축 공간은 오히려 실재로, 양말복은 환영으로 전도된다. 그 복잡한 모나드들의 공간은 서울 풍경을 2층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형태와도 같고, 집/건물들의 집적과 들리지 않는 이야기들과 하나의 사실들의 역사가 아닌, 각각의 이야기들의 입체적 투영도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한 공시성의 다른 장소의 이야기는, 양말복의 장소의 이동들은 개인의 통시적 역사의 자리를 만들며 횡단한다. 



이 고정된, 그러나 구축되는 사실들의 조감은 시간 자체의 질서와 그 변화를 가리킨다면, 바깥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또는 ‘양말복’을 구성하는 양말복의 배우 되기, 이야기꾼 되기는 그것을 한 개인의 이야기로, 역사의 궤적의 파편들의 조합으로 엮어 낸다. 이영조의 시간이 곧 물리적이며, 극적 긴장감을 띠지 않는 현실 그 자체의 시간으로, 이야기에 속하지 않은 배경의 요소이자 ‘죽은 자’의 시간이었다면, 이러한 두 시간대와 공간의 짜임은 사실 서울, 나아가 삶들의 단면들만큼의 큰 좌표와 시간의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힘, 곧 변화의 역량이 이야기의 실재를 보증하고, 유효하게 한다. 대위법적이기보다 안과 바깥, 그리고 바깥을 보증하는 안과 안의 개인사적 횡단으로서의 바깥의 어떤 맞물림이었다. 나무를 쌓는 행위는 이야기가 더해지고,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을 은유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기억이라는 장소



양말복의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파편적이다. 이는 엄밀히 결과의 이야기가 아닌 체험의 순간을 재체험하는 각각의 조각들의 연계되지 않는 나열이며, 도시 자체를 조감하듯이 장소들이 흘레붙는 이야기들이 양말복의 이동 중에 그의 신체로부터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 그런 이야기들이다. 양말복은 몇 가지 흔적들은 세상에 새기는데, 이는 ‘새겨짐’이며 영원한 이야기가 될 그런 강한 흔적이 또한 새겨짐이다. 구체적으로 별빛을 눈으로 따라가 그리거나 거리에서 본 소변의 두 가지 흔적은 전자가 자신의 신체적(-장소의) 기억이라면, 후자는 장소(에)의 기억이다. 마네킹이 살아나 텅 빈 백화점을 탐험함은 상황주의자들의 도시 속 산보를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양말복의 이동은 시선의 무의지적 이동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명시되는 바는 아니지만 ‘세 번째 흔적’은 양말복의 눈물 아닐까. 지하철에 지팡이와 함께 얼굴이 끼게 된 한 할아버지의 죽음에 이름, 그리고 이미 무대 전면에서 누워 있던 (영원히) 잠을 청하고 있던 이영조의 몸이 환유하는 죽음, 그리고 이영조가 쥐고 있던 사진 속의 딸의 모습, ‘양말복’이 확인 못 한-곧 자신의 아버지임을 보증하는 자신이 남산-서울역 풍경을 앞면으로,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을 뒷면으로 해 만든- 사진의 뒷면이 죽음과 함께 떠오른다. 돌아오지 않던 아버지의 돌아온다는 약속이 떠오르며 ‘양말복’을 하염없이 울게 한다.  이미 ‘양말복’은 서빙하는 이의 정체성을 벗어나 양말복에 가까워 있다. 새빨간 거짓말로 모든 걸 부정하며 그것을 도리어 새빨갛게 현상하는 말에 ‘오늘은 좋은 날’(‘운수 좋은 날’)이라는 아이러니한 이야기 바깥과 안의 ‘양말복’의 입장을 아이러니하게 투영해 낸다. 



비극이 깨어나 역사의 원환을 둔, 시작과 끝을 있는 매듭은 서빙하는 이로 돌아오며 그녀가 초고속 광대역 네트워크 망의 구축으로 인해 순식간의 다운로도 속도를 표현하는 ‘1초’가 감각되어 흩어지며 촉촉한 눈동자는 눈물로 이어지고, 수많은 파편들의 이야기들은 그녀를 감싸고 산개한다. 드뷔시의 ‘월광’의 유려한 피아노 선율은 ‘양말복’의 뇌리를, 온 몸을 강하게 타격한다. ‘양말복’은 구석에서 버려지며 허우적댄다. 


개기월식은 시뮬레이션된 관객에게 개기월식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제3의 인물(하수민)이 전한다. 이 모든 게 인류의 광기 어린 염원과 갈망에 소구하는 하나의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환상적인 이벤트였음을 입증하며 그것을 완전히 배신하기보다 유예하는 어떤 결말은 역사와 현재적 미래의 시간의 부조응적/즉자적인 뒤섞음의 측면으로 흐르고, 그 광기와 환희와 같은 개기월식은 현재의 빠른 시간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며 혼을 실어 한 순간으로 구축됐다 사라진다. 이는 관객을 손님으로 바꾸는 판타지는 네 번째 흔적으로서 포개어지지 않는 하나의 기억일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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