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4.12.09 09:27


‘청춘과 잉여’라는 제목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세대-주체적 이름의 이상 담론과 취업의 어려움이 동반된, 견고하고 안정적인 삶의 지반을 획득하기 힘든 비주체를 각각 가리키는, 동 세대에 대 명암이며, 대립하기보다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두 다른 좌표로 보인다. 곧 이 두 이름은 동시대적-세대적 유행하는 이름이며 그렇게 동시대를 호출/호명하는 전시로 느껴질 소지가 있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청춘’은 90년대 국내 호황을 맞던, 곧 밝은 시대가 펼쳐짐을 앞둔 희망 어린 청춘의 시기의 한 자화상과 2000년대 IMF사태를 비롯해,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가 지속되는, 가령 겹치는 시기에서 장기하의 한 노래 중 ‘방바닥에 뒹굴다 못해 방바닥과 내가 물아일체된’ 잉여적 청춘의 단절적 계보 양상을 절합시킨 것에 가깝다. 하지만 더 먼 과거와 또 다른 과거 이후의 특정 시기를 재현하기보다 그것들이 귀환하는 현재를 더듬어 보는 측면에 조금 더 가깝다. 곧 비동시적 동시성의, 내지는 두 개 (이상의) 시간축이 섞여드는 사선의 시간에서, 단순하지 않은 현재를 미래 시점으로 연장하는 전시의 성격을 띤다. 




▲ 박찬경 작가의 '파경 실험 1', <청춘과 잉여>전 전경 사진 ⓒ김도명 [사진 제공=유능사]


우선 전시장 입구에는 이완 작가의 역사의 파편적 수집-간간이 끼어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필적 등이 시계열 순이 아닌 두서없이 뒤섞여 있다. 선형적·주제적 아카이보다 가상의 개인 서재의 일부로 구성된 것에 가깝다. 이는 90년대, 2000년대도 아니며, 한국 근현대사의 소멸되지 않는, 그러나 익숙한 역사적 현재의 거리 둘 수 없음의 공간 구성이며, 실제로 이것을 하나하나 뽑아 볼 수 있는 것처럼 구성됐(지만 이 역시 고정된 전시의 일부)다. 곧 아카이브로서 그 일부를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의도된 듯 보인다. 이 근현대사의 수집물은 미술적/학문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 생생하고 시간이 뒤엉켜 동등한 가치, 가치의 하락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도 크게 뛰어난 것도 아니다. 시대적 무의식의 한 재현과 그에 대한 개인의 무의식적 포착 사이에서 이런 결과물들의 자의적(?) 배치는 그리 정교하지도 뚜렷하게 비평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저 하나의 (두) 평면으로 보이는 데 그치는 듯 보인다-의도된 바로서. 


이 무겁지만은 않은 입구를 지나쳐, 식민 시절을 겪은 (균열을 모색하는 현재의 관점에서 탐색하는) 아시아의 정체성과 단절적 역사의 계보, 역사의 흔적을 재구성하는 수행이 보여주는 파편적 역사의 배경적 접근 정도로 정리될 만한 이완의 작업은 더 좁아지는 게 아니라 주제적으로 무한 확장되는 듯하다. ‘청춘과 잉여’라는 주제가 전면에 드러나는 지점은, 두 다른 시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두 다른 세대에게서 연유하는 시대(적 무)의식에 기인하는데, 전시 전반의 구성이 다섯 작가 대 다섯 작가로 두 다른 세대의 매칭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문제적 전시 타이틀은 실제 거시 담론에 가깝고, 큐레이팅의 관점에서, 90년대, 2000년대에 대한 회고 아닌 회고, 떠도는 이야기와 기억, 흔적들의 맥락이 연결될 수 있음의 여지를 가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이자혜 작가, ‘페미닌 전사 애니로니의 전설’, <청춘과 잉여>전 전경 사진 ⓒ김도명 [사진 제공=유능사]


이자혜 작가의 ‘페미닌 전사 애니로니의 전설’은 전시장을 오르며 계속 맞는 전시 구성상 층과 층을 매개하고 인도하는 벽화와 같다. 향락적이고 상상적이며 즉물적 표현 방식과 텍스트는 역사의 무게를 견디는 대신, 또 이차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허름한-노출된 콘크리트 벽면을 노출하고 지시하는 질감과 함께 공간 자체를 점유/전유한 이에게서 오는 아우라, 어둠과 낯선 조명의 효과와 겹쳐 다분히 촉각적이고 환영적이다. 이 묘한 이종 신화의 시간대가 전시장 곳곳에 편재해, 하나의 방으로 수렴되지 않고 이 전시 공간 전체에 기생하며 공간을 따라 올라가며 놓이기보다 기입하는 형식으로, 그럼에도 자율적인/독자적인 회화는 이 전시 자체의 잉여 같다. 



▲ 안규철, ‘그 남자의 가방 ∥’, <청춘과 잉여>전 전경 사진 ⓒ김도명 [사진 제공=유능사]


안규철 작가의 작업이 일종의 실재로서의 ‘잉여’로 주어진 가방-언제가 될지 모르는 가방 보관의 업무는, 그 시점과 주체가 명확히 주어져 있지 않지만, 어디에라도 둘 수 없으며 그(것이 놓은 장소)로부터 자신이 재규정되며, 그로부터 구성되는 좁은 세계 내에서 현재의 불완전성에 따라 완전한 바깥으로 놓인 자아를 내재적으로 구성하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이 대문자 기표의 잉여는 보이지 않는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음’의 미래에 걸쳐 있는 이상한 현 존재의 자아로 보는 이에게 전이된다는 점에서, 현재의 내러티브적 시간은 무한한 시간이라는 잠재성의 지대로, 다시 말하면 어디에도 없는, 걸치지 않는 시간으로 확장되어 ‘잉여’의 의미를 만든다. 밝은 청춘의 빛의 전시는 회고적으로 지시되고 기록될 수 있지만, 이야기는 보이지 않고 살아남는 문제다. 안규철의 작업을 통해 청춘이란 잉여는 잉여의 청춘의 연장으로 자리바꿈한다. 갱신 또는 특정화된다. 



▲ 이상훈, <조영법>, <청춘과 잉여>전 전경 사진 ⓒ김도명[사진 제공=유능사]
 
잉여의 의미는 존재(세대)의 측면에서 시간과 전시 매체의 직접적 형식으로 치환되는 부분인데, 이상훈의 <조영법>이 그리는 작은 단위의 도형들이 ‘형태소’가 돼 순차적으로 접합·발전돼 생성되는 도형(기호) 구성의 설계도적 디자인/회화의 영역은 일종의 독자적 규칙/문법을 가진 언어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 문법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 역시 사실이다. 이를 마치 차단된 사회로서 또는 그것과의 방패막으로서 택한 작업 공간의 사유에서 출현하는 듯 보이는 지점에서 출현하는 잉여로 이를 볼 수 있을까? 설계도 같은 독자적 세계 구축의 창조적 문법은 하나의 언어로 구축적이며 디자인의 도상 같지만 연필로 직접 그려져 재현의 회화를 떠난 재현에 대한 메타 비평적 회화(어떤 대상이 아니라 작가의 사유/언어를 재현한다)로 회화의 문법으로 모사된, 특이한 언어를 이루는, 디자인적 과정의 좌표들로 그 도형들이 감각된다. 



▲ 박미나, '2014-Black', <청춘과 잉여>전 전경 사진 ⓒ김도명[사진 제공=유능사]


그보다 구세대로서 매치된 박미나 작가의 작업은 국내 생산되는 특정 색(검은색)의 물감으로 구성된 색 타입의 위계 없는 수열이며 재현하지 않는 회화라면, 동시에 특정 세계 내의 물감의 차이와 (검은색과 같은) 반복의 유형학적 아카이브-평면이며 상징계적 현실을 구성한다. 공장 생산의 자의적 규칙이 분절된 (하나의) 검은(색으로 표상되지 않는 검은색들)은 그럼에도 색들을 캔버스에 온전히 표상한다기보다 어떤 엄밀한 디자인의 색채 규격을 제시하는 것만이 아니다. 붓질의 자의성과 그 결과, 캔버스의 표면의 질감 같은 것이 (작가의 어떤 관성 같은 것에 기대) 다름을 느끼게 한다. 또한 하나의 조명 아래 위아래에 동등한 시선을 부여하기 쉽지 않다. 그것은 차이와 반복이지만, 반복이 차이인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수열적 집합이며, 하나의 조명 아래 분절된 것들의 하나의 집합쯤으로, 미니멀리즘의 장소 특정적 아우라까지 풍기는 것 같은 것이다(이는 물론 전시 조건하의 전시장 안의 의도치 않은 감응일 수 있다). 


이것이 어쨌거나 국내 물감의 유형학적 아카이브라면, 곧 예술을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물감의 규칙과 어떤 특정 부분의 문법적 구성이며 따라서 그 사회로부터의 거리 두기가 가능해 보인다면, 이상훈은 자신의 독자적 사유-언어 체계를 통해 보는 이들과 거리 두기, 독자적 사회의 구축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 문법을 모르는 이상 해석할 방안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소쉬르식 언어라면, 이것은 이상적으로는 양적으로 더해질 수는 있지만 또 다른 언어로 생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고한 언어가 모나드로서의 방(전시실)에 안착되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대로의 어떤 시간의 멈춤, 찾을 수 없는 현실의 시간으로 환원된다면(아마 그래서 이 작품이 이 전시의 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시장 대부분의 작품들은 그럼에도 혼종적 시간성을 띠고 있는 듯 보인다. 


이상훈 작가 옆방에는 다시 이 전시 자체를 매개하고 틈입하는 이자혜의 작품이 ‘끼어’ 있는데, 어떻게 보면, 외설적 신화를, 서사를 구축/생성하는 그림들은 하나의 방 안에서도 (만화의 간격이란 문법에서 기인하는 것으로도 보이는) 파편적인 자취들은 그 신화의 성격을, 곧 현전의 어떤 낯선 눈부심으로 다가오는 바 있으며, 층마다 단절/연결됨으로써 기억적으로 연결되는 바 있다. 이 단절-연결의 서사적/시리즈적 구축은 1층 전시장에서의 어떤 문법의 토대와 연결된다. 


기억의 필름을 소환하고 재생하는 방식은 이완 작가의 <메이드 인 만: 설탕>의 노동하는 장면들이 끊기고 재생되며 시공간의 파편적·단절적 시간(그럼에도 기어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아니 덧붙여지는 장면으로서의 시간)의 콜라주로, 역사/타자를 파편적으로 파쇄하며 구성하며, 그럼에도 포스트모던한 시점 자체를 재현/지시하는 듯 보인다. 이와 더불어 박찬경 작가의 <파경 실험 1> 중의 사진들로 이뤄진 영상, 곧 음악으로 마감돼 영상으로 구성되는 사진들은 검은 벽에 프로젝트로 투사돼 전시장(의 질감)과 착종되며, 슬라이드 식으로 끊기며 충분히 볼 만큼 멈춰 있지 않은 관계로, 찰나적 영상의 (비)착상으로만 언뜻 보이고, 역사의 확정지을 수 없는 현대 자본주의 흐름을 재현/전유/수용하는 속도를 띤 기억의 장면들로 구성되며 유일하게 그 판소리의 끊김이 없는 목소리(존재)의 현존만을 담지/체현한다. 곧 구술사적 아카이브의 한 유형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한 (비)절취는 역사를 보는 현재의 방식을 지시/재현하는 듯 보인다. 이 사라져 가는/갈 목소리와 사라진 것의 현전으로서 사진들 모두 각각 이 아련함과 끊김으로 ‘기억’ 그리고 현재의 동시대적 간극/균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2층으로 이어지며 송상희 작가는 이자혜 작가와 매칭된 구-작가로, 특이 서사의 유형을 만들지만,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그리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역사(구체적으로는 미술사적 계보에 따른 또 다른 역사)의 공통분모를 띠고 있고 구체적으로는 <O를 찾아서>에서 처용설화의 접붙이기 맥락, 그리고 인류 탄생의 외설적 버전으로서의 신화-이자혜 작가가 신화를 재현하기보다 신화를 그 자체로 재생한다면, 현대적 서사/현전으로 바꾼다면-는 하나의 ‘이야기’이며,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다. 메타적 성격의 창조의 신화/설화는 사실 자극/징후를 그 이야기에서 노출한다. 


자기에게도 있지만 남자의 그것을 아주 다른 것인 듯 보고 매료되고 알을 먹는 부분은 묘하다. 알이란 중요한 상징들의 분열·복제는 영상에서는 그것의 세계를 체현하는 중간을 분절적으로 구성하는 타일들의 합의 위아래에 메타 역사적 계보가 주석으로 나열되는데, 빈 공간의 시원적 풍경은 차라리 기원이기보다 폐허에 가까운 느낌인데, 유물론적 역사의 파편적 채집이 그 빈터를 메우기보다, 해체된 계보의 역사를 증언하기보다, 하이퍼링크로 분기할 뿐이다. 감각의 모나드(타일) 안에 한정시키고 구분 지을 뿐이다. 공룡 화석과 체과 파리, 인공위성은 어떠한 공통점이 있는가. 첫 번째가 이 ‘폐허의 기원’의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인류의 화석의 유비를 이룬다면, 두 번째는 존엄성을 갖춘 인류 개개인이 아닌, 집단 번식의 유비를, 세 번째는 인류 과학의 발전의 역사적 기억을 구성하기보다 알의 모양의 형태적 유사성에 기인한 의미의 수집의 일부로 보인다. 

영상에서 알을 실재(바다)에 부착되는 매체-편집적 구성된 이미지로 출현하며 바다가 오면 카메라를 덮쳐 거리 두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중간 중간 오버랩 되는 장면은 삽입된다기보다 그저 앞의 장면의 네거티브 이미지로 보이기도 한데, 이 찰나의 깜박임 역시 전시 구성상 앞선 박창경·이완 작가의 ‘단절적 이미지’ 서사의 전략과 또 연계해 볼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전시 순서상으로도 그러하다). 바다(타자)의 넘침은 처음의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오’의 갑작스레 자신의 주거 영역을 침범한 처용의 무-입지를 감각적으로 환유하는 듯도 하다. 




▲ 정연두, 백정기, 'Air Pocket', <청춘과 잉여>전 전경 사진 ⓒ김도명 [사진 제공=유능사]

정연두, 백정기 작가는 유일하게 병치되거나 비대칭적 대칭을 이루거나 절합되거나 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작품을 도출했다. 정연두 작가의 부식된, 부식되는 수조 속 두 장의 사진들로부터 시작된 전선이 3개의 방으로 천장을 타고 과잉의 생명력을 지닌 하위 주체이자 샹들리에와 같은 과도한 장식성을 띠는데, 이 덩굴-전선과 중간 방의 투명한 진공관 안 양초들, 세 번째 방의 녹음기와 담배를 폈던 흔적들이 두 작가의 대화의 풍경을 구성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전선들이 연결된/연결될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하며 가져오는 찾아져야, 맞춰져야 하는 주파수가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을 상정한다면, 담배의 방에서는 조금 더 인간적인 대화의 끝을 맺는다. 두 다른 세대의 어떤 대화(의 의무)로, 또는 그 대화의 흔적으로 백정기는 의미를, 현재를 구성한 셈이다. 



▲ 김영글, '가장의 중심', <청춘과 잉여>전 전경 사진 ⓒ김도명 [사진 제공=유능사]

김영글 작가는 <다이아몬드가 될 때까지>로 돌멩이부터 다이아몬드까지 현대의 신분 질서를 특정 인격을 화자로 상정해 신분 피라미드의 한 표본의 이야기를 추출해 보여준다. <가장의 중심>으로 가장을 둘러싼 떠도는-소외된 주체의 시각에 비친, 기표들로 구성된-세계에서 현실을 무작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파편적으로 아카이브한다. 안규철 작가가 결국 가방을 두고 떠남으로써 전시장에 놓인 가방(관객에게 그 자리를 인계하지는 않는 듯 보인다)을 잉여로 만들고 가방의 주인의 쓸쓸한 그림자와 마주하며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는 식으로 미래를 운명으로 섣불리 확정지어 버리는 이야기의 환상성과는 대비를 이룬다. 

곧 김영글 작가가 시대를 작가가 아닌, 작가가 거리 두기가 가능한 특정 화자의 입장에서 현실을 채집했다면, 안규철 작가는 자신의 처지를 자기 지시적인 이야기를 도출한다. 이야기의 화자로 신화화/신비화하는 가운데, 답이 없는, 답이 없되 그 현재적 미래에 집착하고 침잠하는, 이는 청춘의 사라진 한 형국, 한 세대의 자신에 대한 구출 또는 유예인가. 잃어버린 시대의 좌표 찾기의 불가능성을, 자신의 몸에 기입하는 것인가, 아님 하나의 미래적 시간대로 모두 유예되며 삶의 좌표 찾기가 계속 되는 운명론으로의 도약인가. 청춘과 잉여 전의 ‘회고적 미래’, 시간의 가늠하기 힘든 터널은 그렇게 어쩌면 안규철 작가의 작품에서 시대착오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횡단하거나 사라지는 현실에서 주요하게 드러났고, 그것과의 거리 두기를 통해 현재를 과거로 재정의하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듯 보인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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