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4.11.30 01:00

시뮬레이션


▲ 윤자영 <기로극> (사진 제공=계원예대 현대예술과 퍼포먼스), 이하 상동


기로극에서 ‘기로(棄老)’는 노인을 산속에 내다버리는 기로전설에서 따온 것이다(곧 예순 살과 일흔 살을 이르는 각각 기(耆)와 로(老)로 이뤄진 노인 세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단어 기로(耆老)에 극을 더한 개념이 아니다. 한편 노인 유기를 다룬 이 극은 아들이 부모를 유기하다 종국에 그것을 포기하는 유명한 일화의 차용에 이르면, 인생의 기로(岐路)에 선 주체의 판단·선택의 측면에서 또 다른 기로의 의미도 함축하는 것으로도 읽히는 측면이 있다). 우선 하얀 스크린의 빨간 동그라미 앞에 세 명의 퍼포머가 섬으로써 독자적인 개체 단위로 구성됨을, 또는 디자인적 기호로 표상·전치됨을 보여주는 극은 아마도 세 가족 이상을 리서치한-짤랑이, 염돌이, 시댕이, 사무엘로 극 초반에 설정되는 이름들의 바탕이 되는- 결과를 토대로 어린아이 때의 유희적으로 만들어진 언어 구문, 행동 유형 들을 하나의 단위(이를 일종의 ‘기호적 모듈’이라 부르는 게 맞을 듯하다)로 조직하여 세 명이서 대위법적으로 구성하며 세 각기 다른 캐릭터를 직조한다. 표면적으로는 그저 세 캐릭터가 있고 또한 중첩된 양상으로 하나의 캐릭터에서 다른 캐릭터로 확장되어 간다. 이는 몇 개의 언어·행동 구문들을 관객 입장에서 학습하는 것이기도 한데, 짤랑이에서부터 사무엘·염쩨쩨로 이어지는 세 주요 캐릭터가 왼쪽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주어진다. 캐릭터는 인격이나 그것을 보증하는 대사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닌, (연출 윤자영의) 내레이션을 통한 기술(記述)적 방식으로 기입되는 것이며, 단지 특정한 언어, 몸짓 기호들을 일종의 내레이션의 큐(이는 정의적 역할의 수행이다)에 따라 수행함으로써 캐릭터가 구축되는 방식이다. 


연극의 시작



‘이제 (연극)을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곧 이것은 메타 연극의 차원이며 배우(actor)가 아닌 퍼포머를 기능하게 함(앞에서 일종의 롤 플레이 차원의 역할 설명과 함께 기계적으로 퍼포머가 기능했던 것에 이어),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를 구성할 것임을 일러주는 부분이다. 이미 ‘뚱까뚱까뚱야’, ‘엉엉엉’, ‘염돌이 노래’, ‘니 치팔로마 성악’ 등이 각자의 캐릭터를 구성하는 상태에서-정확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말(내레이션)의 중계·중개가 스크린의 자막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이 극을 어느 정도는, 중반 이후에서 입체-평면의 스크린을 보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조명이 꺼지고 빨간 동그라미는 염쩨쩨의 얼굴을 투사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연극’이( 되기) 이전에 그 붉은 원이 그들 그림자처럼, 아무 움직임 없이 머물러 있던 셈이다. 이어 실제로 조명으로 역할에 영향을 끼치는 셈이다. 


세 캐릭터의 창출은 개체 단위에서 이제 하나의 가족 단위를 구성하기에 이르는데, 사실 염쩨쩨는 아무런 움직임도 하지 않고 있으므로 ‘기능’하지 않는 셈인데, 그 빨간 원을 입음으로써 또는 절합됨으로써 정동(affect) 같은 걸 발생시킨다. 이는 어두워지고 염돌이가 뚱까~ 하면서 어둠 속 빛을 갑자기 잃은 상태에서 늑대의 울부짖음으로 감각되는 순간부터 뭔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니까 노인 유기의 신화적 컨텍스트로 훌쩍 건너뛴 연극은 이전의 캐릭터의 유희적 구문들을 고스란히 가져오고, 오직 그것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묘하게 그 맥락에 착상된다. 게임 속 시뮬라르크와도 같은 캐릭터들은 내레이션에 따라 수행적으로 움직였었고 더 정확히는 말과 절합되며 삐거덕거리며, 그것들을 존재론적인 깊이로 떠안거나 표현주의적으로 발화한 것도 아니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양상은 조명이 달라지고 하나의 가족을 구성하는 가운데, 노인 유기라는 컨텍스트가 부여되며 매우 특이하게 재생되기에 이른다. 노인 유기 문제는 노인 부양이 시급한 대책 마련의 필요성과 결부된 미래 사회의 예후를 드러내는 것으로 (주제/메시지적으로는) 이어지며,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시간 축으로 동시적으로 연접되는 것 속에 앞서 말과 움직임 단위가 재표상·감각되는 것이다. 


기호적 모듈



한편, ‘뚱까뚱까’와 같은 말들은 명확한 의미로 정의되기 힘들지만 익숙하며, 유아어적인데 이는 아이와 노인 간의 가교가 되는, 곧 노인이 아이에게, 아이의 행동 유형을 모사하며 마치 어린아이에 깊은 몰입과 동화 작용을 하며 발생하는 관계론적 언어에 가깝기에, 그리고 언어의 자연발생적 기원에 결부되어 있는 듯 보이기에, 신화적 세계와 현재를 있는 적절한 매체적 언어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아이의 행동 유형에서 노인 유기의 상황으로 건너뜀은, 그것이 정확한 시대보다 어떤 신화적, 우화적 차원으로 기능하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 언어의 기원적 익숙함이 통시적인 시간대의 확장으로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안무/행동 단위, 또는 기호적 모듈은 하나의 언어적인 구문으로 또는 세 명의 대위법 하의 음악적 단위로 처리돼 토시키 오카다의 춤-연극의 양상을 떠올리게 한다. 오카다의 춤이 이유 없는 무의식적 발현의 양상에 가깝다면, 윤자영의 연극에서 춤은 움직임에 선택된 행동 유형의 합을 짜는 것에 가깝고 새로운 컨텍스트 제시와 함께 다시 그 의미가 구성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며 차라리 언어적이라 볼 수 있다. 엄격히 말해 춤이라기보다 또 어떤 텍스트의 일부로 환원되기보다 그 자체가 텍스트의 피륙이며 철저하고 적확한 안무의 일부로 기능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노인이 이들의 안위를 걱정해 자신을 지게에 지고 업고 간 아들의 가는 길에 나뭇잎을 뿌려놓는 증여적 관계와 아들의 뒤늦은 자각의 감동적 서사는, 앞선 유아어적 흥얼거림의 아련함(뚱까뚱까와 같은) 속에 클라이맥스를 찍는다. 이러한 현전의 시간대, 곧 더 이상 캐릭터가 캐릭터가 아닌, 신화의 인물로 기능할 때, 자막에서 제시되는 컨텍스트와 곧 이미 구성된 (단위의) 것이, 현재 함께 극을 구성하는 절합 양식은 텍스트를 가정하기보다 텍스트를 그야말로 직조하는 셈이다. 이야말로 텍스트의 재현이 아닌, 텍스트의 살아 있음, 텍스트의 현전인 셈이다. 곧 텍스트(대본을 비롯해)의 표현 영역이 연극이라거나(곧 연극은 텍스트 이후의 것이라거나), 안무는 안무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거나, 춤은 언어에 부착된 부가 영역이라거나, 음악은 곧 배경음악, 영상은 극의 효과 차원의 배경이라는 사고방식에서 참으로 벗어나기 힘든 공연계에서 벌어지는 융합, 다원예술 곧 다양한 기원의 예술의 신화가 장착된 이상적 예술의 형태를 지향하는 어떤 추세에 부쳐, 그러한 사고들이 이렇게 한 사람의 신선한 감각 속에 부정되고 비판되며, 하나의 차원에서 빚어진다. 


신화적 시간대의 접경



이어지는 ‘효와 지혜의 등장’과 같은 자막은 역시 스크린에 입혀지는, 출현하는 방식이며, 이를 짤랑이인가 찔롱이인가 질렁이인가(짤랑이-찔롱이-질렁이의 명칭 변경은 정신없이 이어지며 일종의 구어적 습관에서 파생되는 여러 변이 양상들의 측면에서 이러한 것을 다시 기술할 때 어려움을 겪는 게 오히려 정상일 것이다)의 습관으로 했던, 문장에서 일부를 구간 반복으로 하는 언어 단위 직조 기계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모듈(제조 방식)은 이를 유희적으로 반복하며 점차 줄여간다. 앞서 빨간 동그라미 앞에 그 뿜어져 나오는 빛을 머금고 있던 시댕이의 엄마, 염쩨쩨는 말 그대로 ‘황혼’의 경계에 위치해 있던 셈이고, 버려졌음을, 버려졌음의 처지를 타자의 위치로 보여준 셈이기도 했다. 곧 유기될 부모가 된다. 짤랑이인가가 잠자는 척 누워 있던 어머니에게 밥을 떠먹여 주던 유아적 행동은 이제 그 위치가 바뀌어 염쩨쩨가 시댕이를 깨우기 위해 밥을 먹여주는 주체들의 위치 전환이 일어난다. 아이와 노인의 긴 시간의 유격을 유아어로 수축시키고 신화 속에서 섞어 냄의 연장선상에서, 곧 ‘노인에서 아이로’라는 공동체의 경계를 재설정하는, 공동체의 출구와 입구를 위치 전환하는 노인/아이라는 존재를 갖는, 이 전근대적인 신화적 공동체 안에서 염쩨쩨와 시댕이의 행동 유형은 비교적 자유로이 전환 가능할 것이다.


한편, 연극 이전에서 연극으로, 곧 캐릭터에서 (캐릭터적) 인물로의 변환, 일종의 시뮬레이션에서 극으로의 전환, 역할 수행에서 역할 되기로의 변전은 사실상 캐릭터에 입히는-조명을 포함해- 컨텍스트로 인해 달라졌듯, 그리고 여전히 그 캐릭터로 남아 있음으로 인해 적당한 거리와 기묘한 감정들을 가져갔던 것과 같이 ‘효와 지혜의 등장’의 반복 구문 재생은 여전히 캐릭터 수행의 차원에서 발현되며, 그 구문이 짧아지며 새로운 단어로 축소·반복되는 과정은 결말로 극을 인도하게 된다. 곧 극은 개념적으로 자막에 투사되며 다시 캐릭터 수행으로써 독자적인 단위로 구성될 뿐이다. 그리고 이 축소 지향의 발화로, 또 그 힘없음, 끝나감의 물리적 효과로 인해, 물질적 측면에서의 편집으로 끝을 향한다. 그리고 푸른 화면으로의 또 다른 변전 양상은 어둠과 불타오름의 신화적 명멸의 시간대에서 캐릭터들은 깔끔한 스크린 평면에 한층 더 밀착하게 된다. 


되감기(과거)이자 재생(현재)



무엇보다 덜그럭거리며 이상하게 유기체적 생명력을 빚어내는, 반복 구문 재생의 매체, 일종의 자동인형은 되감기(rewind)·재생(play)되는 것일까, 이 되감기, 동시에 재생의 시간은 언어를 반복하며 돌아가지만, 단지 시간을 축적한다. 되감으며 사실 재생하는 것이다. (그 되감는 시간 역시 시간의 재생인 셈이다. )우화적 노인유기의 풍습을 캐릭터 수행으로 치환한 텍스트 직조 형식의 극에서, 즉물성의 단위들은 감정을 소비하지 않는 방식으로, 마치 이 되감고 푸는 편집점에 의해 철저하게 ‘구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에 재생·되감기 버튼의 사운드 효과와 함께 그러한 자동인형의 캐릭터가 부각됨은 이 기계적 생명력의 미약함, 다 해감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그제야 캐릭터를 시뮬라르크가 아닌 물질로 인정한 셈이랄까). 무엇보다 과거(신화)와 현재(적 미래)의 두 전혀 다른 시간대가 동시성을 띠고 겹쳐 있는 형국에 따라 되감거나 재생하는 시간의 중층적 기호 양상이 또한 그 물리적 배경 효과의 짧은 구문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 ‘자동인형’으로서 캐릭터들은 조명이 다시 어두워지며 마치 융합될 수 없는 세 존재가 한데 얽혀 오작동하기 시작하고, ‘쩨쩨’가 ‘꽥꽥’으로 변전되는 가운데 동물들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이 악씀은 언어 불가-동시에 언어 유희적 변전이며, 소통 불가의 순간-동시에 접점을 맺는 얽힘이며, 통제되지 않는 편집의 사그라짐-동시에 기계 오작동의 편집-이다. 


p.s. 아마 20-30대(그 이후로는 말할 것도 없고) 연출·안무·비디오/영상·미술 작가 중에 이 정도의 극을 구성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떠오르기에는, 텍스트의 직조 방식이 전혀 다른, 동 세대는 아니지만 강량원 연출, 여신동 연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적극 정도) 아마 각기 다른 이유로 설명될 수 없겠지만 없을 것 같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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