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4.10.24 14:36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 포스터

할머니의 삶-경험을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실존하는 이애순 할머니를 3명의 배우가 나누어 연기/재현(?)한다. 왜 인터뷰라는 방식인가, 먼저 ‘인터뷰’는 텍스트가 작가의 몫으로부터가 아닌, 다른 이의 삶으로부터 가져온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연기되고 재현되는데, 거의 할머니가 되는 성수연 배우를 예외로 둔다면, 실은 배우들은 배우 그 자체로 있어(더구나 남자이다) 할머니와의 거리를 갖고, 이것이 ‘연기되고 있음’(조금 더 진행되면 기록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데 더 가깝다.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이라고 제목을 새삼 상기하면, ‘몇 가지 대화의 방식’이 아닌, 이 이름은 곧 여러 방식으로써 할머니와의 대화에 도달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방식이 수단이라면 대화는 궁극적 목적일 텐데 오히려 이러한 대화로의 환원은 대화 자체가, 곧 이 말을 소통으로 바꿔 보면, 쉽지 않은 것임을 역설적으로 의미한다. 곧 전자인 대화의 유형학적 분류보다는 대화의 불가능성에 대한 응전인 셈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을 무대에 세운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인터뷰와 같이 과거와 (무대에서의) 현재의 기록이 되는 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일방향의 시선이 된다면 이는 윤리적인 문제다. 즉 대사가 아닌 말 걸기, 과거(아카이브)가 아닌 현재의 (아카이빙) 과정이 요구된다. 할머니가 나옴으로써 그 일부분에 속하게 되는, 그리고 인터뷰-아카이브를 재기록하는 무대의 글쓰기는 할머니를 기록하고 다가가기 위한 몇 가지 방식(의 대화)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는 곧 할머니를 재현한다기보다는 재현하기를 보여주며 같이 공존하며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할머니와 관객을(또는 할머니와 자신들을) 잇기 위한 낭독(그야말로 텍스트를 읽는다는 의미에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왜 등장하는가. 이 물음은 이 연극이 할머니의 삶이 한국의 근현대를 가로지르는 보편의 역사적 의미를 체현한다기보다는 ‘이애순’이라는 존재 특정적 의미를 앞세우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곧 역사라는 것이 단순한 과거-사실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이며, 그것을 간직하고 구현하는 하나의 존재가 내 앞에 있다는 것 이상으로 연극이 자신을 연기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에 대한 전제가 앞선 ‘연기/기록’의 자기 근거에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삶을 내세우며, 삶보다 생생할 수 없는 연극에 대한 삶/연극의 분절로부터 나아가기 위한 시도가, 이 대화를 곧 이애순으로의 어떤 길로 본다면, 그 대화의 방식들로써 인터뷰, 연기하기의 과정이 동반되는 것으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배우/이애순의 동반 무대를 통해 연극 속에 삶을 놓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할머니를 배우들이 나눠 이야기하는 그 중간은 할머니를 어떤 시점과 관점에 따라 비추기 위한 노력의 과정인 셈이며, 이는 연극의 사적 경험에서부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는 연극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여러 현실과의 그녀를 연극에 세우기 위한 대화가 전제돼 잇을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삶으로 환원되는 것 같은 연극은, 실은 한편으로는 할머니로부터 받은 크리에이티브 바키의 인상과 이야기를 반영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드라마투르기를 거쳐 텍스트화해 배우들, 그리고 할머니가 다시 발화하는, (재)구성되며 현시되는 바가, 모종의 합의 기반을 전제하며 드러나는 것이다. 이경성이 할머니를 찾아오는 장면에서, 우선 이경성이 자신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온 아주머니라는 소개를 하며 등장할 때, 아마도 관객은 이경성의 집이라 자연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은 할머니의 집인 것 같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할머니의 소품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마치 이경성을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실존하는 인물로 즉자적으로 등장시키며, 얻는 효과는 곧 이경성의 집, 내부, 역사, 사적인 공간을 확인하게 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제 이 집은 거의 자신의 또 다른 집/방과도 같은 이경성 안/곁에 있는 할머니의 공간인가, 아님 할머니를 평소 자신의 외부에서 확인하지 않았던 이경성의 우연한 방문에 따른, 이경성이 확인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맨 얼굴과 같은 오로지 할머니만의 공간인가. 이와 같은 물음이 나오는 것은 결국 이경성이 처음으로 할머니를 방문했을 때의 어떤 놀라움이나 새로움 따위가 이 연극에서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만남의 방식들 자체가 소거되어 있고(다만 전제되어 있고), 이미 가족 구성원과도 같은 친밀한 둘의 관계를 확인하는 가운데, 그 공간이 할머니만의 사적 공간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에 따른다. 곧 이경성은 배우들과 다르게 할머니와의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셈이고, 그에 따라 할머니는 이경성의 신체를 따라 관객과도 큰 거리를 형성하지 않게 된다. 그 친밀함은 무대와의 거리가 가까워서만은 아니다. 더 이상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거리가 없고, 그저 친한 두 사람의 ‘대화’가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후 앞서 나온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다시 반복하는데, 이는 ‘자신’의 연습(의 결과)이고, 자신에의 실행 그 자체일 수 있다. 무조건적인 현시가 아니라 자신의 객관화 작업이며 연극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자신의 삶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연극하는 게 재밌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물론 긍정인데, 현재 연극을 하고 있어 즐겁다는 것으로, 곧 이 연극이 즐거움을 띠고 있고, 이애순 할머니의 삶-연극, 또 배우 되기의 또 다른 과정임을 확인시키고 또 그 연극과 존재 간의 합의를 관객에게 은근하게 강조한다. 일종의 연습(의 결과, 실행)이지만, 그의 시간을 열어젖힘이 이경성의 방문을 통해 구현되는 바이고, 그래서 현시되고 있다. 일종의 과거가 그 자체로 열어젖혀지는 순간이다. 그 행복의 연장선상에 이 연극의 어떤 당위가 잇고, 그래서 오히려 할머니를 지켜보는 것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가한다. 그래서 연극은 이 연극의 이애순 할머니의 감정, 경험으로 수렴되며, 역사의 이야기나 근현대사의 특정-보편의 재인식이 아닌, 현실(현시)과 재현의 뒤섞임으로 구획 지을 수 없게 된다. 할머니를 재현하는 배우의 연기는 결국 할머니를 경유한, 할머니에 대한, 할머니를 전제한 할머니의 일부로 제시되는 것에 가깝다.

성수연 배우가 처음으로 쌀을 씻어 놓았던 것을 밥통에 앉히고, 밥이 되어 먹는 것으로 연극이 끝난다. 실제의 시간을 전체 또는 부분의 시퀀스 단위로 두고, 거기에 연극의 시간을 맞추는 건 이경성 연출이 두산아트센터에서 했던 방식이다. 밥을 먹는 것은 제목을 따른다면, ‘말 없음의 대화’이고, 이 리얼 타임의 작동은, 할머니가 걸레질을 하며 타자로 무대에 남겨질 수밖에 없는 데서 먼저 등장하는데, 이 걸레질은 시늉이 아니라 극장 바닥을 현실 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앞서 할머니의 방이 이경성의 곁인지, 그 밖인지가 중요한 것은 이것과 연관되는데, 곧 할머니가 이경성의 집을 청소하는 게 사실이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비추는 건 윤리적인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할머니의 집이고, 할머니의 평소 행위이지만, 그럼에도 할머니의 노동이 이경성의 삶에 전반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으며, 한편으로 그것이 평생의 할머니의 일상의 노동이라고 할 때, 이를 재현이 아닌 실재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그러니까 할머니를 우리 곁으로 두는 이경성의 방문과는 달리, 마치 이 공간에 할머니만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유령처럼 지켜봐야 하는 것은, 할머니의 자발적인 행위라기보다는, 그것을 실재라고 치환해야만 하는 연극 자체의 메타 의식 또는 드라마투르기의 방식, 또는 연출가의 의식 자체와의 불편한 맞섬, ‘꼭 할머니의 일상의 노동을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굳이 극장에서까지 보일 필요가 있었을까?’의 물음을 들게 한다. 따지자면, 이 바닥은 그저 일반적인 방이나 마루보다 매끄럽지 않은 표면이며 할머니는 더 무릎이 아프고, 더 힘들 것이다(물론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는 단지 무대의 질감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그것은 깨끗함을 만든다기보다 그저 이미 청소된 무대 바닥의 공허한 훔침에 가깝다. 이는 할머니의 삶-행위가 연극을 말 그대로 덮고 있고, 거기에 우리가 간섭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또는 이 무대를 할머니의 영역 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또는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는 할머니가 밥을 먹기 전에 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며(그러니까 우리는 크리에이티브 바키가 할머니를 옮기고 무대에 세우기까지의 방식이 윤리적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또 그래야 실질적으로 밥이 되기 때문에 이 행위는 온전하게 벌어졌을 수도 있다. 결국 밥을 먹으며 연극은 말 없음의 사태, ‘이상적인’ 대화의 공동체를 만든다. 이 연극의 제목을 설명하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을, 그러니까 대화를 곧 언어로 규명하고자 했던, 그 언어가 무색해지고, 몇 가지 방식으로 대화를 만들고자 했던, 연극은 훈훈하고 정겨운 광경으로 (조명과 함께) 화해 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 없는 대화에 그 뜨거움의 얼얼한 입과 김의 감각에 더 이상의 말을 잊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연극은 '이애순'이라는 한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이애순을 포함한 우리라는 관객-공동체, 가족, 그에 대한 어떤 따뜻함 자체에 대한 메시지 아닐까. 곧 이 식사로의 초대를 통해.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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