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4.10.21 17:24

‘법 앞에서’

▲ 연극 <투명인간>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아버지의 생신을 준비하던 가족은 암묵적 규약을 만든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들을 찾지만 이들은 정말 아버지를 외면(外面)하고, 그 경계의 외피를 파고들고자 하는 아버지는 계속 실패함으로써 단절된다. 그에게는 도달 불가능한 장벽이 있고, 더 이상 그것이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그 스스로가 오인된 존재인지, 그 자신의 오인된 인식인지, 누구로부터 그것이 생겨나는지를 알 수 없다. 곧 투명한 ‘벽’이 생긴 셈이다. 마치 그 규칙의 동의와 시작 지점이 더 이상 그 기원을 찾을 수 없게 된 것 같은 시점에, 벽은 더 이상의 물리적인 실체로 드러나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규칙이 아닌 사실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과연 잊어버리는 대로 그 규칙, 이제는 법이 된 그 규칙은 비가시성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 분명히 아버지는 신체를 갖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신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존재가 되는 것만 같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척한다. 하지만 그것이 ‘척’인지가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애초의 암묵적 규약은 어떤 이념형이나 현실에 진짜 영향을 끼치는, 이데올로기 효과를 의미하는 것 같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벌어지는 순간의 사투는 아버지의 신체를 실재의 근거에서 비가시의 영역의 무근거로 바꾸려는 팽팽한 줄다리기와 같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 신체를 인식하면서도 그 인식의 지점을 은폐하려는 그 경계에서, 그것을 뚫고 나가고자 한다. 이는 그러니까 아내에게 투명하지 않은 인간이 되고자 하기보다, 그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용인하지 않으려는 아내의 조작되고 있음에 부단히 맞서고 있는 그런 순간이다. 애초에 투명인간에게는 그 스스로로부터 연유하는 비가시성 자체가 곧 자신의 심리적 벽이자 실재적 한계이므로 이것을 가시성으로 바꿀 수 있기보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알리면 된다. 또는 그 실재성을 마다하고 투명인간으로 남으면 된다. 곧 존재함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비가시성의 영역에 있음으로 인해 투명인간이 된 남자에게 그를 지각하지 않는 가족들의 암묵적 규칙은 법이고, 그는 그 ‘법 앞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한편 이 비가시성은 그가 인간으로서의 식역 불가능성의 지점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가령 그가 가는 공간마다 가족들은 그를 내버려 두고 다른 방으로 옮김으로써 그를 유폐된 존재로 두는데, 이는 앞선 카프카의 『법 앞에서』와 함께,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부재하는 게 아니라 부재하는 게 더 나은 어떤 존재, 또는 부재를 용인하는 법적 테두리 안의 (비)존재가 된 것이다.

식별 불가능한 경계-신체

▲ 연극 <투명인간>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실상 투명하면 투명하게 보여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투명함은 가시성의 식역에서 어떤 정보도 담고 있지 않은 것이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무대로도 드러나는데, 철골 프레임으로 구축된 공간이 그것이다. 이는 가상의 절단면으로, 그것을 넘나들면서 공간은 바뀜에도 마치 그 절단면은 계속해서 그 경계를 드나듦에도 마치 아무 것도 없는 뼈대 자체로 인식되지 않는 것 같이 존재한다. 가족이 외면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무대에 남겨지는 아버지의 흔적, 그 아른거림, 그 보이지 않음은 관객에게서 비로소 작용한다. 그에게 도달하지 않는 시선이 형성하는 그와의 텅 빈 경계에 우리의 시선의 영토가 있다. 그러니까 그의 보이지 않는 신체는 우리의 시선이 멈추는 지점이 된다. 분명 보이며 또한 존재하던 순간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족은 그를 내버려 두고 도망치고 아버지는 쫓아가는 과정이 끊임없이, 일종의 숨바꼭질로 펼쳐진다. 가족의 시선은 볼 수는 있지만 닿을 수 없다. 애초 아버지, 어머니, 두 신체의 접면은 그 경계의 지정이고, 이제 그것을 더 이상 통과할 수 있거나 식별할 수 없게 된다.

벌레-대상으로의 변환

▲ 연극 <투명인간>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아버지는 스스로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나중에서야 거울을 보고 자신이 보인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데, 거꾸로 아버지는 더 이상 가족들에게 가족도, 또 가족을 넘어서 있는 타자도 아니며, 마치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자신들의 신체 내재적인(곧 신체 바깥의 것이 아닌) 무엇이 된다. 이 보이지 않는 또 은폐된 잉여물은 이제 아버지-법을 부재의 너른 터전으로 묶어 두며 치환하는 거대한 비가시성의 법에 의해 도치된 대상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전환은 사실 놀랍다. 그 전환으로부터 이 공연의 실재의 부조리가 발생하는데, 왜 아버지는 그렇게 사라져야만 할까. 이는 아버지 권위가 축소된 현 시대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 앞서 말한 관객의 시선의 식역이 되는 그 축소된 몸/벌레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관객-현대인이라는 것을 더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청소기, 냉장고의 진동은 사실 공간 전체 환유로 기능하며, 벌레로 축소된 아버지의 신체와 맞물려 공명하는데, 가족은 그가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연관된) 이 소음 자체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 소음은 꽤 길게, 곧 리얼 타임으로 작동하고,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치 상황처럼, 아니 그보다 더 길다. 벌레가 된 아버지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쓴 플랜 카드를 소리를 내 읽는다. 더 이상 주체나 존재가 아닌 대상으로 머무는 것이 내는 소리는 식별 불가능한 소리이다(이 부분 역시 카프카와 상관관계를 이루는 ‘벌레’의 형상의 연장이다). 고개를 흔들며 그 흔들리는 가운데 말이 음절 단위로 분쇄되며 제대로 종합되지 않고 그 흔들림의 파동 가운데 삐죽 조금씩 튀어 나온다. 이는 타자 형상도 아니고 그야말로 괴물-동물-비인간의 어떤 지점이며 이제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식역으로서의 그의 신체는 이제 우리 자신을 마주하며 그것이 정말 투명해져야만 하는 어떤 외상의 징후로 자리한다. 이 신체를 보는 시선은 불투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철저히 언어로부터 발생하지만, 비언어의 지대이다. 따라서 더 이상의 ‘말’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환원 불가능한 끝을 갖는데, 이 투명인간은 우리 사회의 상징계적 존재에서, 우리 자신의 사라짐의 현상을 체험케 했다가, 돌연히 벌레-괴물이 되어 우리 앞에 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보는 가족이 되거나 마치 그것을 우리 스스로의 어떤 내부의 지점으로 돌리거나 맞아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카프카의 어떤 미학의 지점을 연극적으로 변용하며 실재적인 것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가운데 생기는, 강량원 연출의 신체 미학을 통과한, 그래서 당도하는 괴물은, 분명하면서도 이상한 감각들을 도출한다. 그리고 이 결말은 (개인적으로는) 물음표(적 마침표)에 가깝다.

▲ 연극 <투명인간>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Buzz this
me2DAY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mikwa@naver.com

[예술 현장에 대한 아카이브와 시선, 온라인 예술 뉴스 채널 Art Scene]
<Copyright ⓒ 2009 아트신 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