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4.10.01 15:34

 

▲ 김지혜 <형상 없는 미술관> [이미지 출처=국립현대미술관]http://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menuId=1020000000&exhId=201408060000100#

첫 번째 ‘인식장애극장’(방혜진 기획)의 <형상 없는 미술관>에 이르기 전 두 가지 질문을 갖고 간다. ‘미술관은 안무를 구성/생성할 수 있는가?’와 ‘안무는 전시와 상충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각각 미술관의 극장화 내지는 퍼포먼스화의 역량, 그리고 전시 ‘속’ 안무의 실천과 함께 미술관의 전시품 보호의 임무/역량이 가능한가의 물음이다. 물론 이는 화이트박스 안에 블랙박스를 단순히 장착하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경우이다. 여기서 두 번째 물음은 전시장 안에서 퍼포먼스가 일어난다는 가정 하에 가능한 물음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시장 바깥에서 펼쳐지는 무용, 곧 치외법권적 좁은/넓은 틀이라는 영역에서의 안무가 실천됐기에 애초 가정될 필요가 없는 물음이었다(그렇지만 이러한 물음이 던져진 이상 이에 대한 물음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 글 안에서. 그리고 두 번째 물음은 다른 퍼포먼스에서, 이후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미술관 전시 바깥의 일종의 잉여 공간으로 처리되는 공간의 활용, 그리고 전시라는 초점의 대상에서 벗어난 동선에서 마주치는 움직임들은 미술관 자체의 기능 (불)충족에 대한 어떤 잉여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다.

각기 다른 퍼포머들(김지혜, 현지예, 송은지, 이건학, 정영두)은 전시장 바깥에서 자신만의 영역들을 만들지만, 여기에는 프레임으로 포획될 수 있는 시선이 없다. 이는 전시장을 벗어났기 때문에, 나아가 온전히 설치될 수 없으며, 동시에 이미 설치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설치를 볼 수 있는 공간과 그것의 나눔이 전제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끊임없는 얕은 시선에 의해 붙잡히고 다시 풀려날 뿐이다. 그리고 흘러가는 동선과 한정 없는 (관람객에게 우선적으로 해당하는) 시간 속에 멈춰진 채 유동하며 생기 그 자체로서 이 좁은 영역 자체를 (전시장의 구획으로) 가시화시키지만, 이는 결국 전시장이라는 구획 바깥의 타자의 영역이 아니라 그 전시장 자체의 규격과 규칙을 체현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 자체가 하나의 전시장이라는 의미 영역에 놓이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하나의 실험이자 타자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아마 여기서, 하나의 무용 작품들, 아마도 즉흥적으로 펼쳐지는 부분이 더 많을 것이라고 보이는 이 작품들에 대한 보다 정확한, 그것 자체의 심미적인 가치를 찾아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작업은 미술관이라는 장소 자체에 대한 의식을 환기시키며 장소 특정적인 어떤 형태의 미술 작업으로 소환될 수밖에 없다. 일단 이 작업들은 전시장 바깥이었지만 미술관 내부이거나 그것 안이었으며(일종의 건물들이 감싼 테라스에서 일부 작업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는 미술관 내 경계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들 각각의 작업이 의도적으로 그런 식으로 표방됐다기보다는 어떤 구획들과 한정된 영역에 대한 분할이 미술관 내부의 제도적인 규준들에 의해 (무)의식적인 영향 아래 성립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우 자유롭게 전시장 바깥의 영역들을 선점해 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을 했지만, 실은 앞서 그 시선이 닿는 곳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처럼, 이들은 전시될 수 없는 신체의 비가시적 시선의 영역을 상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공간(의 경계)을 (일부) 사유하지 않고 마치 움직이는 듯했다(어떤 예외는 있었다). 곧 이는 미리 정해진 공간 안에서 그 제도적·물리적 경계를 (무)의식적으로 잊어버렸기에 이는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 또는 미술관/전시장 바깥에서 전시와 상충하지 않고 또 하나의 시간/미술관을 작동시키는 데 대해 타협하며 안전한 경계를 확보했기에 가능했음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 시선이 그 경계에 닿지 않는, 또한 최대한의 집중이 가능해지기에 발현되는 (그들 스스로에게 해당하는) 자연스러움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선이 닿지 않는 물리적·제도적 경계는 실은 이 작업이 일어나는 환영성과도 맞물려 있으며, 결국 이 작업을 전시장 바깥의 또 다른 전시의 영역으로 맞바꾼다. 이런 제도적·물리적 경계가 분명히 그어진 공간에서 그것을 사유하거나 탐색하지 않고서, 단지 얼마나 자연스럽게, 또 다양하게 자신의 안무적 사유의 조각들을 펼쳐 놓는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심미적이라고 해서 (극장이 아닌 미술관 안에서 벌어지는 이런 경우에 있어)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을 가능하게 한 전시(장) 바깥이라는, 전시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살아있는 화석’의 또 다른 전시라는 어떤 사전적 규약은 사실상 이 속에서 (어떤 물음도 상쇄할 만큼의 심미적 극장을 만듦으로 인해 독자적으로 성립함으로써) 배제된다. 하지만 이 전시(장) 바깥이라는 것은 애초에 이 미술관 자체에 대한 탐색과 그것 자체의 한계와 어떤 가능성을 중층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기획의도에서 아마도 출발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형상 없는 미술관’은 그 구획됨(으로서의 미술관)과 설치됨(으로서의 전시)의 견고한 형상을 움직임으로 대체하려는 어떤 시도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완전한 환영은 불가능하다. 또는 그 환영이 앞선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관객과 만나며 그것이 달라지지 않는 것일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결국 공간 자체에 대한 생각을 무용수들은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제도적·물리적 경계를 인식하고 탐색하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학의 경우 고개를 숙이고 발을 끌며 바닥 자체의 질감을, 그리고 의식 없는 신체로 미술관 바깥의 어떤 무의식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었다. 그가 들어갈 듯 들어가지 못하는 그 1전시장을 다 보고 엘리베이터를 돌아 나온 계단에서는 계단 한 칸씩 일상의 사물들을 올려놓고, 미술 관련 도서를 노래하는 이의 입장에서 마치 낭독하듯 읽는 송은지가 있었고, 이 경우만 목소리, 언어, 악기가 사용됐는데, 미술 관련 텍스트의 개념적 표피성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데 그치는) 퍼포먼스였다. 한 층 밑으로 내려오면 정영두가 매우 좁고 작게 움직임을 시작해, 관람객이 이룬 커다란 울타리에 둘러싸여 뱅글뱅글 도는 흡사 폭풍의 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전시의 영역이기도 한 벽의 수학 문자들의 추상 기호들과 조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깊숙하게 테라스 쪽으로 들어오면 김지혜가 거의 안무의 교본 혹은 그녀의 독특함의 결정(結晶)들이라 할 만한 움직임들을 쏟아냈다. 사실 앞서 말한 것처럼 심미적인 부분 그 자체(에 대한 즐거움, 감상)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거의 최상급의 즉흥 안무 역량을 보였다. 그리고 이는 무대에서도 그만큼 가까이 보기 힘든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반면 그는 가장 온존하게 그 영역 자체에 속해 있었다. (여기서 다시 만약 왜 이 작품들을 작품 자체로 보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결국 미술관 속 무용이 아닌 미술관 내/외의 무용, 곧 미술관의 바깥에서 벌어지는 부대행사로서 춤 그 자체에 대한 외떨어진 정의를 내리라는 것밖에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한 손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악기의 리듬을 만드는 가운데 다른 신체 영역을 추동하는 장면은 춤이 어떻게 음악 없이 음악화되며 그 신체의 리듬과 공진화되고 음악과 신체가 이미 떨어져서 있지 않은 것임을 증거로 하는 장면으로서도 유효했다. 거의 완전한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이는 단순히 과장 섞인 표현만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무용수들과의 즉흥/표현적 역량을 가늠해서다.) 그렇지만 그는 이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자신의 극장으로 사유·체험했을 뿐이다. 이는 그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작업의 기획과 배치의 역량(의 실패)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본 것은 매표소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현지예의 작업/춤이었다. 각 무용수들이 동조화되는 게 아니라 각자 따로 자신의 리듬대로 춤을 추고 쉬었다 다시 리셋 되어 하는 그런 개념인지라 처음 전시장에서 보지 못했다. 현지예는 벽을 타고 다시 벽을 되짚어 오는 과정을 느리게 지속했고, 처음 시작할 때 이 벽이 꺾이기 전의 길지 않은 벽에서 어깨를 빼서 손짓을 하며 손-인형극 듯 자신의 신체를 바깥으로 이전하기도 했고 양 옆으로 고개를 빼는 가운데 이 벽 자체를 부여잡고 추는 탱고의 거리를 형성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이 벽 자체가 일정 부분 그의 파트너가 되는 장면들로도 볼 수 있었다.

눈을 감고, 나아가 절대로 눈을 뜨지 않은 채, 벽에 밀착해서 매우 천천히 움직이며 그 벽 자체와 일체화돼서, 또 그 벽에 의존한 채 조금씩 자신의 팔을 움직여 미세하게 그 신체 움직임들을 자각하는 그런 춤/안무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전시장 바깥을 나와야만 볼 수 있었고, 전시장 안과 밖의 중간지대로서 벽을 전유한다는 점에서(처음 시작에는 전시장 안에서만 보는 게 가능했다면 대부분의 시간 그가 활동하는 벽은 전시장 안에서는 볼 수 없다.) 미술관이라는 공간, 그 경계를 사유하게 하는 측면은 가장 강한 듯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닫힌 작업이기는 했다. 그럼으로써 가장 자유로운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 밖의 시선과 소리를 마치 흘러가는 바람을 체감하는 가운데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벽과의 밀착, 그것의 절대적인 의존은 표현 자체에 전심을 기울이게 한 반면, 오히려 관람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표현됨에도 표현되는 것으로 사유/체험되지 않는 것이 ‘인식장애극장’이라는 이 기획 자체의 개념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인식장애’는 그러나 인식의 장애를 일으키는 극장으로서 전시장을 생성하기보다 그 전시장의 극장으로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전시장의 한계로부터 시작하며 그것을 지적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기존의 전시장, 미술관과 전혀 다른 무엇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환상이 아니겠는가.

사실 춤은 이 미술관(의 관객·시간)을 재현하기도 했고, 또 하나의 전시가 되기도 했으며, 또 하나의 극장을 만들기도 했다. 여러 중층적인 시선이 혼재하는 가운데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은 앉아서 쉬기보다 끝없이 흩어지며 그 흘러가는 동선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여지가 크다는 점에서 출현하는,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시선으로 이것들을 마주하며 이 극장은 일시적이고 또한 그 고정되지 않은 우연한 마주침에 하나의 절대적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거의 유일한 가능성이기도 할 것이다. 누가 정영두 작품을 보러 왔다는 마인드로 그것을 볼 수는 없다. 설사 그렇더라도 곧 그는 자리를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춤은 미술관이라는 거대한 컨텍스트의 일부가 된다. 분할된 모나드들로 기능하던 이 춤들의 제도적·물리적 배치는 실은 전시장 바깥의 전시장이라는 구획된 것에 다름 아니었으며 그것을 탈주하는 의지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건학이 일정 정도 관람객을 체현했다면, 송은지는 전시라는 것의 컨텍스트를 재현했고, 정영두가 관객과 말없이 말을 걸며 관객(의 움직임 없는 시선)과 큰 판을 벌이기도 했다면, 김지혜는 온전한 자신만의 극장을 만들고 거기에 침잠했고, 현지예는 그 미술관의 어떤 경계에 있었지만 그것은 미술관 자체의 알레고리를 낳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 실은 사투를 벌이고 자신이 호출한 타자를 부여안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벽 자체와 맞닿으며 어떤 미세한 흔적의 드로잉을 거기에 남기며 그 벽 자체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작업의 진정한 의의는 무엇일까. 무용수/안무가들의 무의식적 미술관 내에서의 적응에서 발현하는 흥미로운 움직임의 탐색이라 할까, 아니면 미술관의 극장으로의 확장 가능성을 확인했고 극장이 미술관에서 실현 가능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에서 나아가 미술관과 극장의 분할에 대한 규정을 일시적으로 의미 없게 만든 융합적 공간의 의미 발생이라 할까, 그렇게 본다면 앞서 이 미술관이라는 공고한 영역 자체에 대한 닿지 않는 의식에 대한 비판은 무의미한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두 다른 영역, 미술과 무용의 두 각기 다른 장의 인식의 상반됨으로 이는 수렴될 수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는 흔해 빠진 환원주의적 견해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환영이 성립하는 것이 이 미술관의 가시성의 비가시성화에 따른 것임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실은 그 가시성이 너무나도 명확하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이(그 가시성의 은폐)는 환영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 가시성을 드러내고 그로부터 시험하는 것이 인식장애극장의 애초 출발하는 지점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에서 퍼포먼스를 사유해봤다. 

p.s.끝으로, 앞서 해명되어야 할 물음에 대한 답은 잠정적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퍼포먼스-설치와는 또 다른 인식장애극장에서 <눈먼 자들의 극장>, <피부 밑에 숨은 이름들>이 그 각기 다른 예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백현진이 퍼포머로 출연한 <눈먼 자들의 극장>은 일종의 미술관(전시장 바깥)을 자전거를 타거나 갖고 돌아다니며 흥얼거리거나 즉석에서 노래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별다른 내용으로서의 언어가 들어오기보다는 형태적으로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마치 미술관 자체를 3D 스캐너로 스캔하는 것과도 같았다. 전시장 바깥이라는 또 다른 전시장에서 관객을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반응하며 노래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자전거와 함께 일종의 쓰러진 신체로부터, 음악으로, 그리고 이동과 노래로, 마지막으로 다시 쓰러진 신체로 가는 재귀적이고 수미쌍관의 구조를 지니긴 했으나, 다른 식의 재현이 들어갔다기보다는 그가 텍스트를 노래로써 가지고 노는 평소의 방식을 생각하면 될 듯하다. <피부 밑에 숨은 이름들>은 꽤 복잡한 영화-(연)극인데, 블랙박스-설치가 이뤄진다. 영상과 퍼포먼스는 서로를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보증하고 확장한다. 마지막으로 인식장애극장과 묶여 다원예술프로젝트 Ⅱ 《안녕! 헬로!》를 이루는, 김실비, 니콜라스 펠처, 하이에나즈의 <스펙트럼 의식(Spectral Rite)>은 앞선 물음의 대답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는 자세하게 기술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이들 퍼포먼스가 전시장 난입을 했으며, 그리고 전시 물품과 동화 또는 모방을 하는 순간도 있었고, 도슨트를 모방/풍자하는 등 여러모로 전시의 수평성 자체를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있었는데, 곧 미술관이라는 제도 자체와의 긴장은 그것과의 소통 끝에 가능했음을 인지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 하나의 영역에서 고착되지 않고 다양하게 미술관에 분포하며 그것을 활용하는 전략은 놀라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Buzz this
me2DAY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mikwa@naver.com

[예술 현장에 대한 아카이브와 시선, 온라인 예술 뉴스 채널 Art Scene]
<Copyright ⓒ 2009 아트신 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