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4.10.01 14:50

전시 <늘 거울 생활>(아트선재센터, ~11월 30일)은 관(람)객을 전시장 안에 포함시키며 개입시킨다. 이는 관객의 직접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관람 동선과 시각과 작품이 맞물리는 과정들을 체계적으로 구현했음을 의미한다. 제목에서의 ‘거울’이라는 알레고리는 난해한 듯 보이는 전시장 구성에서 관객의 위치나 시선, 비디오 작품에서의 이중적인 정체성 또는 균열, 수행으로서의 연기(演技) 등에서 나타나듯 실재를 보는 게 아니라 환영적인 체험을 통한 그 너머의 것을 나타나게 하는 어떤 방식과 연관되는 듯 보인다.

▲ Sung Hwan Kim, Watermelon Sons, 2014, Performance Courtesy of Sung Hwan Kim and Art Sonje Center, Photograph by Seoul Photos Studio © 2014 Sung Hwan Kim

2층의 전시장은 시선의 분절과 의도치 않은 참여를 만들어 낸다. 이는 전시장을 완전히 해체·재구축한 끝에 사물/존재의 쌍이 아닌 사물-존재의 중첩된 공간 그리고 혼재됨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로써 ‘돌아다니는 시선’과 이미 포함되어 버리는 신체를 만드는 개입이 작동한다.

먼저 비스듬하고 좁은 입구가 신체-의식을 옥죄고 하나의 조명(빛)이 바깥에서는 그것의 시뮬라크로(그림자)로 존재하되 전시장에서는 사물로 놓인다. 얇은 입구의 나무 패널을 넘어 비치되 세 개의 공간은 만화경처럼 각각의 다른 이미지가 세 겹을 이룬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들어가는 통로는 일종의 투명한 경계가 아니며, 마치 하나의 구멍과 같은 좁은 입구로서, 차원의 변화를 만든다. 들어오는 입구, 곧 안이라고도 바깥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경계 지대는 들어갈 때는 이미 차원의 이동으로 인한 다른 공간이었다가 들어오고 나서 세 겹의 조명으로 인한 어떤 착시로 인해 바깥으로 나와 앞선 그 상대적으로 어슴푸레했던 공간을, 있었던 이전의 어떤 공간으로 기억하게 한다. 곧 시뮬라크르로서 떠오른다.

이 비스듬한 공간의 기억은 (입구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첫 번째 시선’의 신체를 자연 작동하게 한다. 곧 다시 시선을 입구, 이제는 출구가 될 그 통로의 축을 따라 돌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다시 원래의 입구보다 더 깊은 곳으로 신체는 환원되고, 곧 첫 번째로 마주하는 게 새 그림인데, 이 좁은 공간에서 검은 바탕에 드문드문 그려진 하얀 선분의 자취를, 게슈탈트적 감각으로 확인하는 새다. 그리고 그 옆의 그림 새의 도감을, 원본과 복제(복사본)의 동일성(의 차이)을 친절한 전시 설명의 메타 텍스트를 전시의 일부로 옮긴 것이라는 어떤 유머의 일종으로 이해한 후, 몸을 돌려 나오는 지점에서 좌우로 같은 그림의 확대·축소와도 같은, 또는 잘 보이지 않거나 일부만 보이는 그림 둘을 공간이 시선에 가하는 제약 자체와 함께 바라본다. 작가/전시는 세 개의 그림을 통합하는 하나의 시점을, 그리고 이는 비로소 관람자의 시선으로 체현하게 되는 하나의 지점을 그렇게 명확하지 않게 박아 놓았다. 곧 이 지점은 앞선 통로로 들어오며 새로운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으키는 지점에 상응하는 전시장 안에서의 또 다른 출발점이다. 이미 분절된 여러 장소·공간들 역시 이 부분에서 전시장 안에서는 가장 명확하게 한 눈에 확인하(지 못하)게 된다. 이 불명확한 확인은, 그림을 가리고 아니 그 제약된 시선까지 하나의 공간을 보는 시선으로 구성한 이 전시는 좁은 여러 공간, 시각의 제한 지대를 만나게 하며 시선으로 포함시킬 수 없는 장소적 체험을 전시의 일부로 구성할 것임을 예측/선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선의 지점에서 전시는 일종의 전시(장)이 만드는 공간의 제약을 시선의 영역(그 너머)으로 포함시키면서 독자적인 대상으로서의 회화라는 모더니즘의 신화를 전시장이라는 배치-기계의 특질 속에서의 공간/체험과 함께 일종의 (‘회화의 설치’가 아닌) ‘설치적 회화’로써 깨뜨리며 전시의 역량을 시선-체험의 다감각으로 확장/구현한다. 이 지점에서 본 공간은 사실상 마치 초현실주의 화풍의 시기에서 사물들이 안정감 없이 놓여 위태로운 의식의 경계선상에서 무의식을 건드리는 추상회화의 한 프레임으로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 들쭉날쭉하게 위치한 새 그림으로부터 시작돼 공간에 대한 시선을 수렴케 하는 이 원근법적 소실점의 가상으로서 위치하며 보는 단 하나의 통합적 ‘회화’는, 걷기 시작함으로써 그 원근법을 벗어나며 체험의 영역에 접어들게 되고 일종의 가상으로서 사라진다. 그럼에도 이것은 이미 실재로는 설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김성환, <마나하타스 댄스>, Sung Hwan Kim, Manahatas Dance, 2009, Video, 16min, Courtesy of Artist and Wilkinson Gallery © Sung Hwan Kim

이 시선으로부터 가려졌던 좌우의 패널들, 그 공간 안에는 두 개의 영상이 자리하는데, 우측에 <마나하타스 댄스>다. 2009에서 ‘마나하타스’는 델라웨어 족 인디언들이 식민 지배를 받기 이전의 맨해튼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당연히 윤리적으로 시도·재현되지 않는) 역사의 자리만을 제목에 그 자취로 기록하고 이민자의 꿈으로 상징되는 뉴욕으로 시선을 옮겨 1911년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를 담은 분절된 사진적 이미지들과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 첫 취임 연설문의 한 구절 “우리는 자동차에 연료를 공급하고 공장을 가동시키기 위하여 태양과 바람과 토양을 이용할 것이다”의 국가 이념을 미국 개척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선취함으로 옮겨 간다. 이는 겹으로 된 통이 큰 이국적 치마를 입은 아이들의 퍼포먼스와 병치되며 펼쳐지는데, 앞선 역사의 재현으로서의 이미지에 대한 시선이 흔들리고 불안정하며 최소한의 윤리를 가져가는 데 비해 아이들은 천진난만하며 입에 문 투명한 오브제가 어둠 속에서 마치 엑스레이로 감광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어떤 색채의 향연에 싱크가 맞지 않는 대사들이 중첩된다. 과거와 현재·미래의 시점이 이질적으로 맞물려 오바마의 연설로 수렴되는 이 비디오는 목소리/말이 갖는 채워짐, 채워져 있음의 자리를 흔들리는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유지하되 실패하는 동시에 그것과 거리를 두는 영상)과 유동적인 (아이들의) 움직임의 생성과 맞물린다. 결과적으로 기록적인 성격을 띠되 비-내러티브에 가까우며 중첩된 역사(시간)의 감각 자체로 환원되는 어떤 현재가 해소될 수 없는 천진난만함의 소리와 이미지의 기억과 함께 하나의 말로 수렴된다.

▲ 김성환, <아다다>, Sung Hwan Kim, A-DA-DA, 2002, 16mm/Video, 20min, Courtesy of Artist © Sung Hwan Kim

두 번째 영상 <아다다>는 형제 혹은 친구로 보이는 같은 나이대의 두 남성 퍼포머를 등장시켜 아버지와 아들을 연기하게 하고, 아들의 시점에서 술 취한 모습으로 ‘벗겨’라는 식으로 아들에게 명령하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를 내레이션으로 담아내며 진행되는데, 그러한 일상 공간을 벗어나면 두 사람이 마치 동등한 입장에서 일종의 작업 공간 같은 곳에서 맡겨진 과제를 수행하기도 한다. 이는 정체성을 주어진 역할로 환원시키며 그 사이(단순한 퍼포머라는 존재)에서 의도를 읽게끔 하는 지점이다. 외국인이 한국인의 언어를 전유해 어색하게 분절되며 정상적 언어에서 미끄러지는 언어는, ‘아다다’라는 말더듬이의 함의에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마치 파악할 수는 없지만 작가의 유년기의 기억,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외국에서의 경험과 연관을 맺는 것은 아닐까 추정하게도 하지만, 우선은 체화된 언어가 아닌 대본·대사로서의 언어임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일종의 흉내 내기의 언어를 이 두 배우가 연기하기와 함께 드러내고 있다는 데서 오는 이국의 경계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새겨지는 체험이다. 그러니까 한국사람 혹은 아시아인으로 보이는(실제로는 아시아계 외국인) 이 두 배우가 낯설게 표현되는 지점이 결정적으로 언어라는 점으로부터 그 외양으로부터 오는 환상이 깨지고 있다. 그것은 신체 내재적인 목소리인 것처럼 우리 스스로에게 전이되어 드러난다. 이러한 균열되는 목소리로부터의 균열되는 신체를 우리에게 옮기고자 한 것이 이 비디오의 어떤 결정적 의도로 보인다. ‘아버지’를 부르며, 회상하며 바닷가를 보는 아들의 시선을 드러내는 클로즈업된 그의 (말 없는) 등은 말없이, 사라진다.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 없는 어느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그 자체로 아들보다 아버지를 체현하는 이 장면은 내레이션의 겹침과 텅 빈 신체와 한편으로 바다 소리 속에서 구현된다. 바다에서 뛰노는 많은 이들과 함께 펼쳐진 바다로 급격하게 카메라 시점이 이동한 후 조상현의 ‘심청가의 눈’이 병치되는데, 정서적 충격을 주는 부분이다. 마치 엔딩 크레디트의 올라가는 자막 언어들과 같이 그 말은 표면에서 뚜렷하게 자리를 남기며 사라져 간다. (이는 앞서 일종의 해설로서의 메타 전시의 영역을 전시에 포함시키며 온전히 전시만의 문맥을 구축하는 것과 같이, 형식 자체를 형식을 가진 내용으로 만드는 작가의 역량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두 개의 영상은 검은 카펫 (또는 경계)에서 보게 되어 있는데, 검은 카펫은 단지 바닥이 아닌 평면의 공간으로, 전시의 맥락으로 편입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이것에 앉을 때도, 곧 일종의 보는 것으로서의 네모난 프레임, 그리고 공간의 바닥으로의 누임-설치에 신체를 포갤 때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렇게 불편하게 전시에 포개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으며, 앞서 전시장을 들어올 때처럼 패널은 하나의 선분으로부터 나뉜 것으로 패널들이 짜여 있어 안과 밖이 분리되지 않고 단지 구분되고 나아가 들어간 것인지 나오는 것인지 하는 혼란을 안기게 된다. 특히 이는 왼쪽의 <마나하타스 댄스>를 볼 때 해당되며, 영상이 <아다다>보다 작게 설치되어 있고, 공간도 그에 맞게 더 작게 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나오면서 (회화, 설치, 건축으로서의) 네모난 검은 프레임이 있고 이 역시 밟지 않고 <아다다> 다음 공간으로 갈 수 없고 그 옆에 파란색 구조물이 약간 중첩되어 있으며, 옆면이 나무 프레임과 같은 색이라 그 높이(가 있음)를 가늠하지 못하고 잘못하면 발에 채이게 된다. 중간 중간 위에서 내려온 조명(따로 전시장 안에 원래 있던 조명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설치 안에서만 쓴 조명으로만 전시를 구성했다)이나 서 있으면서 빛을 내는 어떤 시선-신체로서의 구조물, 허공에 떠 있는 나무 막대기 등이 온전한 평면성을 거역하며 시선을 분산되게끔 만든다.

온전히 영상, 회화, 설치로 수렴되지 않은 체험 이후에, 3층에는 2층의 구멍/문/경계로서의 입구 대신 들어가기를 일차적으로 저지하고 또 주저하게끔 하는 어둠의 패널-경계를 마주하고 그 좁은 경계를 타고 들어가면 영상을 보는 자리, 건축적 풍광을 확인하게 된다. 곧 입구의 불투명한 프레임과 대구를 이루며, 보는 게 아니라 볼 수 있는 시점의 시작으로 시선을, 몸을 위치하게 한다. 그리고 여전히 막힘의 시작은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영상의 막으로,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다. 이제 영상이 전하는 소리만을 등 뒤로 하며, 오히려 그 스크린으로부터 멀어지며, 그 와중에 검은 스크린으로서의 카펫을 밟으며 꽤 먼 거리를 걸어(거의 전시장 입구에서 전시장 끝으로 간 셈이니, 이층의 공간 경험에 비해서도 지나친 확장의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좁은 객석에 위치하고, 또는 그 앞 검은 카펫에 앉게 되고, <템퍼 클레이>를 보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분절되고 파편적인 서사의 궤적을 이루는) 영상에서 단지 어떤 ‘템퍼 클레이’라는 단어들로만 기억될 수 있음을 관객의 체험의 일부로 설명했는데, 곧 작가의 생각은 내용과 형식의 분리된 쌍, 또 메시지나 내용을 담는 형식, 곧 얼마나 작가의 생각이 잘 전달되었는가, 그것을 결과적으로 얼마나 잘 표현했는가라는 의문을 자신에게, 또 작가에게 되묻는, 소통을 일종의 하나의 코드 아래 매체적 한 형식으로써 동일한 내용이 주고받을 수 있음의, 소통 이론과는 차이가 있다. 가령, 작가에게 있어 여기서 ‘템퍼 클레이’는 하나의 기표 그 자체로, 그것이 기억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 김성환, <템퍼 클레이> Sung Hwan Kim, Temper Clay, 2012, Video, 24min, Courtesy of Artist and Wilkinson Gallery © Sung Hwan Kim

<템퍼 클레이>는 그러한 ‘템퍼 클레이’와 같이 음절들 자체로 공명하는 목소리와 함께 바로크 음악의 신성하면서도 하나하나의 화음으로 퍼져 나가는 데이빗 마이클 디그레고리오의 음악에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재현된 삶과 호숫가 별장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의 파편적인 이미지들, 가령 쥐불놀이를 하는 남자의 뒷모습, 얼굴을 가린 종이를 태우는 장면 등을 병행이 아닌 병치시킨다. 또는 하나에서 또 다른 하나로 점프한다. 일종의 이미지-몽타주에 가깝다. 이는 앞선 <마나하타스 댄스>나 <아다다>에서의 두 대별된 공간, 현실 또는 일상과 그것과 구분되는 또 다른 안(<마나하타스 댄스>에서 아이들의 유희가 드러나는 실내 공간) 또는 바깥(<아다다>에서의 바다)에서처럼 호숫가 별장이라는 또 다른 안의 공간을 구축한다.

작가의 소통 체계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작가가 관객의 체험의 영역, 반응을 전시의 (확장된) 일부로 생각한다는 점인데, 특히 2층에서 관객이 작품에 완전히 (시선-신체로서) 포개지거나 포함되는 부분은 철저하고 적확하게 기획된 것에 가깝다. 이는 설치와 보는/체험하는 이를 나누어 생각하는, 곧 대상과 주체를 나누는 이전의 공간관 대신 주체와 공간이 서로 협응하며 생성되는 ‘장field’의 개념에 상응한다.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 중 20%는 완전히 전달될 수 없다.’고 한 말은 그 20%가 작가가 온전히 예상하고 산출할 수 있는 여지가 아니라는 데서(더 정확히는 관객의 20% 역시 아니라는 점에서) 모호하게 비치는데, 결과적으로 작품의 100%의 것이 그대로, 깨지지 않고 전달되는 것이 불가능하며,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관(람)객에게 있으며, 그 20%를 그 백 % 안에 둔다는 것으로 보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80%의 계획된 것(그럼으로써 비교적 해석이 명확한 부분)과 20%의 유동적인 해석의 지점이 뒤섞인 지점(작가가 염두에 둔 부분)이 다시 관객의 20%의 유동적인 부분으로 접합된다. 여기서 앞서 관객에게 맡긴 것으로 계획한 20%는 물론 너른 범위에서 작가의 계획이며, 관객이 새롭게 인지하는 20%와는 물론 다른 부분이다.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 개념이 관객의 해석하는 몫의 절대적 자유성과 저자의 또 다른 권위를 부여해준 지점이 있다면, 김성환 작가는 관객의 반영적 시선까지를 작품 안에 고려해 계획한다는 점에서 상호 반영적인 동시에 제한적 소통 이론을 구상해 낸다.

또한 어떤 작품/전시가 한 번에 조망/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라, ‘템퍼 클레이’의 예처럼 부분으로만 남거나, 또 뒤늦게 떠오르는 부분으로 삶 속에서 연장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 역시 인상적이다. 여기서 ‘텍스트’는 시간과 신체, 곧 각자의 삶의 일부로 연장되고 확장된다. 이로써 작가는 전시 자체를 완전한 자의성의 영역으로 돌리는 대신, 수많은 기표들의 중첩과 관객 각자의 컨텍스트가 놓이는 삶의 자리라는 맥락 하에 위치하는, 아니 위치할 수밖에 없는 20%의 부분들을 여러 모로 고려하는 셈이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김성환 작가가 언급한 전시의 맥락과 전시를 보며 떠올리는 관객의 맥락을 구분하는데, 완전히 자의적인 영역의 텍스트로 전시를 만드는 대신, 어쨌거나 80%의 확실한 무엇을 제시하는 가운데, 20%의 절대적인 관객의 맥락까지를 고려·구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작가의 말은 작가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한층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로 <아다다>가 가리키는, ‘말더듬이’가 갖는 그 자체의 말의 형식( 그 자체로서의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말더듬이의 말을 명확하게 듣고자 그의 말을 끊으면 정작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아무 말도 들을 수 없게 됨을 주장한다. 오히려 그 더듬는 말들 가운에 어떤 분명한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더듬이의 언어, 이는 곧 80%의 언어만을 보여주는 작가의 전략이 아닐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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