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4.05.22 15:20

▲ <신목 167 사방> [사진 제공=레스빠스 71


<신목 167 사방>, 네 개의 작품이 하나의 기둥 공간을 감싸고 합해지고 있는, 아니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유기적 표면의 조각들이다. 곧 신목을 동서남북, 네 개의 방위에서 바라보고 그렸으며 이는 네모난 캔버스의 틀로서 네모난 기둥과 절합되며 전시장에 나무의 상징 공간을 예시한다. 이는 실제 나무가 갖는 위치성을 재현하며 동시에 신목으로서 그에 대해 갖는 의식(儀式)의 의식(意識)을 체현하게 한다. 이 기둥에 상징의 힘을 가져오는 동시에 그것과 맺는 입체적인 위치 설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 나무들을 보자 긁어내듯 음영을 만들어 그 두터움을 표현하는 한편 그 숲 같은 잎들의 뻗침이 예사롭지 않은 기를 형상화한다. 동시에 검게 음영진 중간은 동물의 가죽 같은, 그 위의 털과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일종의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이 아닌, 그래서 불분명한 유기체적 형체(나무에는 가지가 없다)로 어떤 불확실한 생명을 가정하게 한다. 전시장에 들어와 전면에 놓여 있던 이 신목 입체 캔버스 전시 형태를 지나, 전시 전경에는 그, 털 같고 동시에 숲 같은 이상한 생명체로서의 신목과 유사한 털들을 갖는 괴기스런 동물들이 펼쳐진다. 눈과 귀가 없는, 뿔이 달린 이상한 생명체들은, 그래서 분절됨 없는, 괴기스런 유기체의 형태에 가깝다(여기서 처음 신목이 생명체로서의 형태를 띠고 있었음을, 조금은 더 원시적인 그것으로서, 어느 정도 확신하게끔 하는 단서가 된다).


▲ '삼신뎐' 전시 전경 [사진 제공=레스빠스 71] (이하 상동)


사실 이것들은 상상에 상상을 더해, 여러 사람의 입과 작가의 귀를 통해 가능했던 작업이다. 곧 감생 설화에 대해 아마도 최소한도의, 설명과 질문을 통해 어떤 이미지를 가상으로 만들고 이를 제시하며 어떤 형태들을 만들어간다.


이는 어떤 집단 무의식의 원형(적 상징)을 끄집어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그렇다고 전제한 채 하는 것은 아님이 맞다. 즉 융의 이론을 재현하거나 증명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어떤 이미지를 작가의 창작 그 자체로 소급·환원시키며 이미지 자체에 아우라를 부여하는 대신에 뭔가 그럴싸한 상상을 통해 이야기의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며 사실상 어떤 ‘공증(공공의 증명)’의 형태를 받는 것에 가깝다. 이는 작가의 방법론의 일단이며 그래서 이 허구의 이미지에 창작의 현실 과정 자체를 전제하여 작업에 대한 의미를 부여·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감생 설화의 추상성을 전제하고 동시에 그것이 막연한 이야기가 아님을 과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증명해 가는 것이다. 이는 그러나 인터뷰를 한 관객에게 그 의미가 돌아가기보다 결국 작가의 (다양한) 작업 형태로 귀결되며 변화의 양상을 빚어낸다는 점에서 역시나 계속적으로 유효한 작업 형태다(작업만 지속된다면).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은 다양한 현실의 담론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흥미롭다. 곧 감생 설화를 다시 지금 여기에서 상상해 보되 그것의 의미를 발현한다기보다 다양한 태도와 입장들을 확인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상력이 예술의 중요한 방법임을 전제함이 깔려 있기도 하고 곧 상상 자체가 창작의 일환이 됨으로써 관객을 창작자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어떤 작가의 낌새를 느끼게 하는 측면도 있다. 감생 설화는 섹스 없이 임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는 삼신할미의 영험한 힘 자체에 대한 평소 확신을 한층 제고하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이에게는 피임의 문제를 비롯해 여성이 가져야 할 사회적 부담을 더는 페미니즘적 의미에서의 적극적 전유의 담론이 될 여지를 갖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섹스를 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진화한(?) 종족의 형태를 꿈꾸면서 사이버 섹스의 담론을 출현시키기도 한다. 


‘삼’은 이 전시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삼은 털(가죽)의 형태로 입체적 상징으로 상형문자의 형태를 실현하며 또한 제의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다시 ‘삼위일체 방석’(작가가 동양자수를 의뢰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는 입구에서 좁은 공간의 어둠 속에서 ‘삼위일체의 영롱한 소리’를 듣는 것으로 연장된다. 


‘삼신뎐’으로 명명된 이번 전시는 설화적 상상력에서 아마 출발해 현장의 기록, 인터뷰 채집을 통해 그것을 구체화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많은 시간을 두고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김삼연 명곡리 이장과 박계락 풍수지리학 박사의 인터뷰를 통해 TV에서 나오지 않은 그리고 사람들이 아마도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는 명곡리 ‘술술술 아파트’가 여성의 나팔관, 성기를 상징하는 게 아닌, 반대로 남자의 성기에 가깝다는 풍수지리학자의 해석을 통한 진리(?)에까지 근접한다. 



그 과정에서 이것들을 상세하게 기록해 묶은 정갈한 편집·디자인의 동명의 책까지 내놓았다. 작가 자체에 대한 정보, 작가관까지 구체적으로 살필 수는 없지만, 이번 전시를 완성하기 위한 풍부한 근거들을 찾아보는 게 가능하다. 책 가장 뒤에 실린 두 개의 글에서 임영주 작가 내지 작품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해를 갖게 된다. 가령 “임영주의 드로잉 과정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고, 들은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상상력과 입을 거치면서 이야기 구조가 선명해지고, 다양한 변이형을 만들어내는 설화 창작원리와 동일하다. (……) 작가의 작품은 감생感生에 대한 여러 사람의 상상과 느낌이 모여서 감생 이미지로 형상화된 공동창작물이다.”, 이런 박현숙 구비문학 박사의 의견에는 동의가 된다. 작가의 작업에 대한 찬사이지만, 한편으로 문학적 창작 방식으로서의 의미를 다시 재고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김소원 미술비평가의 현대인의 ‘속된 욕망’이라는 점에는 반쯤만 동의하게 된다. 욕망에는 그 밝고 어둠 자체의 속성을 부여할 수 없을 거라는 점에서. 


아이를 갖고자 하는 욕망부터 명당을 좇는 사람의 욕망들이 결코 삿된 욕망일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명품을 좇고 과잉 소비의 쾌락을 느끼는 것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말처럼 죽음 충동에 기인하는 것까지 들지 않더라도, 고귀함의 지위를 대변·상징하는 명품, 아니 고귀함에 대한 욕망 자체에는 죄가 없다(그에 대한 사회 시스템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 행위들이 갖는 천박함에 휩쓸러 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또한 필요할 뿐이다). 오히려 그 전제를 들추는 임영주 작가에 대한 작업이 향하는 방향 자체에 흥미를 갖는 것으로 족할 듯하다. 곧 원형적인 부분과 현재의 우리 삶의 욕망이 향하는 곳 내지는 상상이 도착하고자 하는 어떤 지점을 이어 나가는 그녀의 작업이 향하는 최종 귀착지가 궁금한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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