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4.05.20 13:04


 


▲  《한 시간 전시(One Hour Long Exhibition)》(사진 제공=아트선재센터) (이하 상동)


지난 4월 8일,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에 열린, 《한 시간 전시(One Hour Long Exhibition)》는 한 시간 안의 전시를 구성해 낼 수 있는 역량에 집중한다거나 또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시간의 제한을 조건으로 두고자 하는 것(아마도 그렇게 유추되지만)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궁극적으로 전시는 그 최종 구성물만을 보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구성하는 한 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것이 전시라면, 일반적인 전시에서의 전시 설치의 행위와 그 흐름은 그 작품의 완성을 위한 단순히 기능적인 부분이거나 관객에게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 부분이거나 부수적일 수밖에 없는 부분임을 벗어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 한 시간 동안의 흐름이 전시의 영역에 들어오고, 관객은 그것을 구경하고, 따라하며, 전시 현장의 일부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행위는 수행성을 체현하고, 무엇을 만든다는 것의 과정에서 가깝게 또 행위, 그것을 보고 있고,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음을 낯설게 지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그 전시하고 있음을 퍼포먼스로 보여준다기보다, 곧 이중적으로 관객을 의식하고 그 자연스러움을 드러낸다기보다 관객을 의식하지 않음을 관객이 느끼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는 삼중의 철벽으로 또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전시를 퍼포먼스로 진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관객은 존재하는가. 그저 사람들이 있다. 이 설치자와 구경꾼의 간극에서 형성되는 낯설게 보기 또는 실제 그것과 거리를 갖는 방관자들로 인해 이 행위는 통상의 전시장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이 유령적 행위들을 보는 사람들과, 이미 그것이 보여주려 하는 것이 아니므로, 또한 그 최종 결과물 자체가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보지 않는, 이미 그것을 포기한 사람들의 두 레이어를 보는 조망의 시선을 가진 자에게(만) 마치 재현 자체가 현시되는 것이다. 마치 전시의 과정과 전시의 결과가 한데 엮이는 중첩된 시간 속에 실은 어떤 긴장도 없고 설사 그 긴장이 있더라도 마치 키치적인 집단의 잦은 이동만이 있다고나 할까.

 


이는 결코 재현이 아닌데, 오히려 뭔가가 벌어지고 있음 그 자체의 낯섦은 신선함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구성-규칙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시간의 전시는 벌어지고 다시 지워져야 한다는 것 역시 포함한다. 그러니 어쨌거나 또 하나의 볼 수 없는 전시 이후의 광경까지 주어지게 되는 것이기는 하다. 관객은 참여자가 아니라 철저히 소외되는 유령 내지 방관자가 된다. 그렇지만 참여의 여지가 없지만 우리가 이곳에 있음은 전시의 전제 조건이 된다. 한 시간 동안 전시가 벌어지고 일어났음을 증거로 하는 증인으로서. 


그럼에도 퍼포머들의 동선을 좌우하거나 그에 영향을 끼치는 공간적 제한의 오브제로서 기능하는지도, 사실은 현장 안에 있었음에도 그것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정도의 미미한 영향은 있었겠지만, 이미 공간은 설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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