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4.03.05 14:10


▲ 모래의 여자(각 색 ‧ 연 출 구자혜, 출 연 윤현길, 백석광)_photo by 김도웅


 긴 어둠, ‘도대체 이 공간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은 작품의 시작과 함께 떠나지 않는다. 초반 어둠과 함께 등장하는 여자의 메아리-목소리, 그리고 이후 그것이 반복되고 지속되지 않는 엄밀히 언어가 되지 않는 소리는 가령 이 바깥의 신체가 아니며 어떤 음악적인 부분의 효과로서 장식의 초과적인 측면이라고 하기에는 조심스럽고 미약하다. 


 이는 이곳에 낯선 자로 자리하지만 그에게 낯선 자로 있는 여자의 무의식의 결로부터 연유하는가, 오히려 이는 이 노래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갈 수 없는 가운데 죽어나간 수많은 영혼의 것인가, 이는 그 둘의 바깥에 있는 반면, 그렇다고 그 바깥을 상정할 수 있는 것조차 아니다.


 이는 모래가 바람결에 부딪혀 띄우는 실재의 노래를 환상으로 착각한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곳은 갇혀 있는 곳이 아닌, 또한 그 보이지 않는 존재-시스템이 드러나지 않은 그 바깥으로부터의 바깥인지 모른다. 다만 이들은 이 나갈 수도 던질 수도 없는 이 공간 자체에 대한 물음을 자신들에 대한 존재 물음으로 대신하며,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는 그 바깥에 있다고 일견 보이는 관객 역시 마찬가지이며, 그 ‘누구’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지점에 있게 된다.


▲ 모래의 여자_photo by 김도웅


 그럼에도 <모래의 여자>는 어떤 찾음에 대한 과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갇혀 있음을 인식할 수 있는 어떤 불운한 사유의 잠재성’ 자체가 그 자체의 의미이며 끝없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이 닫힘‧갇힘 자체가 우리 세계의 속성임을 그려내는 것 아닐까.


 나가면 죽는다, 그러나 나가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는 금기와 충동의 충돌과 같이, 닫힌 현재와 불가능한 미래로의 도약은 어쩌면 초월을 염원하며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는 인간의 숙명 자체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툭툭 끊기는 장의 변전으로 인한 어둠의 현전은 소설(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을 희곡으로 각색하는 데 있어 시간의 길이를 줄이는 한편, 시공간의 변전을 위한 무대 변환의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이는 둘의 호흡을 끊는 측면에 그치기보다 이곳이 벗어날 수 없는 곳임을 상기시키고 죽음으로 빠르고 깊게 흘러가는 불가피한 호흡을 나타내는 은유적 기호에 가깝다.


 남녀가 누군가의 시선 아래 전시되어 있고, 거기서 출구 가능성을 찾는 것은 곧 이곳이 경계에 관한 것, 그 경계를 인식하(게 되)되, 그들은 관객으로서 대입할 수 있는 심연이 아니라 관객에게 (낯설게) 드러나는 존재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관찰되고 있고 그 관찰자에 어떤 부응할 수 있는 지점을 줄 때 이곳이 열리리라는 것은 언뜻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인간』이란 희곡을 떠올리게 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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