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3.10.25 13:29


▲ 김실비_’남자를, 군인을’_2013_ 단채널 HD, 색, 무음, 3’20_가변 크기_영상 스틸 [사진 제공=스페이스 오뉴월]


스페이스 오뉴월에서 김실비는 3개의 영상에서, 스튜디오 작업을 포함하면 총 4개의 연작(‘금지곡들: 여자란 다 그래’Banned Songs: Così Fan Tutte)의 영상들의 소리를 지운다. ‘노래방-뮤직비디오’란 형식은 원래 소리가 없다. 가령 노래를 위해 제작된 뮤직비디오가 부재하는 경우에 있어, (인위적으로 만든) 그 뮤직비디오 속 이미지는 단지 노래를 부르는 데 있어 가사를 목소리와 동시적인 관계 아래 적시에 제공하며 가사의 배경이 되는 화면은 가사와 큰 연관성을 갖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가사 바깥에서 그것은 어떤 유용성이나 가치를 담보하지도 않으며 그 이미지가 갖는 서사나 정보 역시 온전히 파악 불가능한 가운데 이를 노래에 맞춰 만든 이의 의도 역시 알 수 없다. 이는 그저 아카이빙된 화면의 단위들이 무작위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펼쳐지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목소리를 제공하는 이 외의 사람에게 잉여적인 스펙터클의 파노라마로 흘러갈 뿐이다.  


김실비 작가의 연작에서 목소리를 지운, 아니 애초에 목소리의 실천/수행을 기다리는 가사라는 텍스트를 제하고는 의미를 얻지 못하는 이 이미지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이는 그 외부에서의, 현재의 누군가이다.


▲ 김실비_’난 밤색 머리 남자가 좋아’_2013_단채널 HD, 색, 무음, 3’16_가변 크기_영상 스틸 [사진 제공=스페이스 오뉴월]


가령 베를린의 꽃집과 시위 현장을 배경으로 한, 제2장 ‘남자를, 군인을’(In men, in soldiers)에서 여자(코지 판 투테’에서 하녀, 데스피나 역, 이 ‘역’이라는 것은 영상의 오페라 형식의 전유에 의해 후차적으로/해석적으로 획득된다. 그렇다고 이는 오페라의 서사로 환원/재현되지 않는다)는 끊임없이 정면을 보고, 곧 카메라를 향해 노래/말을 하며 이는 자막과 일치하는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이끈다. 동시에 이는 그것을 듣지 못하면서 듣고 있는 바깥의 이의 목소리를 대신해, 그리고 노래방 뮤직비디오라는 틀 안에 들어감으로써 스스로의 목소리를 외부로 드러낼 기회를 잃어버린 채 그것을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는 아무 관계없는 누군가로 이화異化되며 소비되는 (노래방-뮤직비디오의) 방식이 아닌,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며 그 이화/소거의 특정한 매체 형식 안에서 온전한 목소리를 구현해 낸다. 곧 ‘들리지 않음으로서 들음’/‘듣지만 듣지 못하는 피상적 들음’으로부터 목소리를 구출해 낸다. 


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은 맞지만, 들을 수 없음의 불가능성에서 ‘듣기’에 대한 욕망과 그것에 대한 좌절로부터 오는 쾌락과 내재적인 목소리의 창출을 이끌어 낸다. 이 영상은 이 ‘들리지 않음’의 불가능성으로부터 ‘들릴 것 같은’ 아득한 거리를 벌리며, 들림이 영상과 합치될 때 출현하는 즉자적인 거리를 지운다. 


가령 화면 속에서 한 타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기보다 ‘말하는 주체’의 끝없는 불가능성의 대화에 대한 미끄러지는 시차적 욕망을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목소리를 지움으로써 화면 속 여자는 현재 우리에게 말하기보다, 또 그것을 통해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대신, 다른 현재, 곧 과거의 어느 한 자리 속에 있었던 누군가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만약 그 목소리를 들었다면, 이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건네는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 목소리는 실은 이를 이루는 매체 형식에서는 데스피나의 노래로 전유되어 실상 그것이 같은지 아닌지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차원이 된다.


▲ 김실비_’무정한 사람아! 왜 도망치나요?’_2013_단채널 HD, 색, 무음, 3’33_ 가변 크기_영상 스틸 [사진 제공=스페이스 오뉴월]


 앞서 언급한 ‘자리’는 그(녀)의 배경이 되는 화면인데, 통상 이 화면 자체가 노래방-뮤직비디오의 그것에 가깝다. 베를린 시위 현장, 제주 강정마을에서의 사태/투쟁으로서 공간(제4장 ‘무정한 사람아! 왜 도망치나요?’Unkind one, why do you run away?)으로 그것을 이화시키며, 모든 정치적 현실/사실을 지우며 그것에 무감한 폐쇄된 골방(노래방)에서 정동/감정의 미학과 현존, 또 다른 배설 행위를 추구하는 이들의 모습과 등가/전도되면서, 지워진 목소리와 재전유된 클래식 노래들 뒤로 그것은 잔여적이고 ‘공공연한 은폐’의 형식으로 빚어지고 있다.


이는 정치적 테제 자체에 대한 것 대신에 정치적 현장을 포함해 그것이 다뤄지는 방식 자체에 대한 (메타적‧자기 반영적) 드러내기이며, 동시에 작가가 고안해 낸/재전유한 매체 형식과 일치시키며 그것의 한계선상에서 드러낸다. 또는 매체 특정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두 영상 중 전자에서는 그와 상관없는 (것으로 보이는) 목소리, 후자에서는 배우들의 연기를 전면에 배치해 (목)소리를 지움으로써 미학적인 마감 속에, 그럼에도 전면과 후면이 비동시적인 동시성을 띠며 아이러니한 균형을 이룬다. 동시에 의도적인 불완전한(?) 완성의 현상 속에, 사라지는 (목)소리와 이것을 그럼에도 보기보다 듣고 있는, 보지 못하는 대신 어떤 목소리의 발생을 목도하는 불완전한/불명료한 경험 속에, 내재적인 노래방의 공간적 경험으로부터의 균열을 낳는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미래적으로 당도하는 개입에 대한 어떤 우리의 목소리로, (부)조리한 현실에 균열을 일으키는 잔존하는 현실의 사라지지 않는 이미지에 대한 기억으로 아마도 관객은 소환된다.


p.s. 전체의 영상 가운데 두 개의 영상(만)을 한정적이고 또 과잉적 비약으로 바라/읽어봤다. 베르그송의 시간 이미지와의 연관성, 모차르트의 서사를 잠재하는 형식으로 둔 것과의 연관성 역시 추후 읽어내야 할 과제. 을지로 공구상가와 청계천의 (메타-)역사적 공간(제3장 ‘다들 그녀 탓을 하지’Everyone blames her)에 관한 부분/백색 실내 배경의 시간이 무화된 채 한없이 부유하는 듯 보이는 두 사람의 유사-연극적 의례 행위들로서 빚어지는 관계성과 그로 인한 환상적 공간(제1장 ‘난 밤색 머리 남자가 좋아’I will take the chestnut-haired)-이는 한편으로는 이번 전시에서의 4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전작 <오인사격(Friendly Fire)>과 유사해 보인다- 역시.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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