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3.10.16 02:06

<주름, 짓다.>(두댄스 씨어터+건축사무소 SOA): 축자적 ‘건축’과 비-인간 되기 (feat1968-)



굳어져 가는 형성 과정으로서의 건축의 시차적 작용, 곧 완성되었을 때 그야말로 끝나는/용도 폐기되는 매체로서, 단지 과정으로서만 유효한 역설적 건축의 젤라틴 의상과 그와 결부되는/절합되는 몸짓, 이는 흐름과 그것의 연장, 인간-주체의 움직임/안무로 볼 수 없는, 말하자면 비인간의 형상-되기의 안무였는데 이는 그 의상의 생성 작용의 신체의 안무의 제약과 함께 한편으로 사각형 패널 속이라는 공간적 제약에서 기인하는 부분이었다.


 이를 의상과 투명한 공간의 건축적 요소들과 결부 짓지 않을 수 없지만, 움직임 자체로만 본다면 곽고은은 투명 매체로 연장되려는 경향을, 공영선은 곽고은과 간접적인 관계 맺기의 측면에서 연장하려는 경향을 가져가는 듯했다.


 만약 이 투명 패널이 없었다면, 이들의 비인간 되기, 유영과 꿈틀거림의 특성은 효과적이지 않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이 드넓은 공간에서 하나의 시각적 초점을, 무엇보다 집중을 생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p.s. 이 작업은 그런데 이상하게도, 건축-테크놀로지와 무용의 융합적 구현이라는 화려한 명명보다는 1968년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열렸던 <투명풍선과 누드>란 해프닝을 떠올리게 하는 일면이 있다. 관객 참여로 빨대로 분 풍선을 정강자의 몸에 붙이면, 작가가 이를 터뜨리며 드러나는 누드로, 당시에는 문화적인 심급에서 파급력을 갖기보다는, 법의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다루는 외설과 검열의 대상에 가까웠다(가령 최근에는 연예인의 퍼포먼스에 대한 치안과 엄호의 역할을 하는 게 경찰임을 생각한다면 이는 커다란 차이이다). 제4집단으로 서로 교류를 맺어 온 전위적인 당시 작가들에 김구림 작가 역시 있었고, 이 작업은 자연스럽게 스미어 있던 시대적/매체적 측면에서 무의식적 정서의 아이디어가 재출현한 것 아닐까. 그럼에도 무용수들을 이화시키며(가령 정강자와 관객 사이 역시도 벽은 없다) 실은 옷을 벗는다는 콘셉트가 차용됐지만, 온전한 누드는 아니며, 사실 누드 자체가 정치적인 테제일 수 없는 시대에, 정치적인 것 역시 예술의 수사로 전유되는 시대에, 시대의 전위는 실험(이라는 수사)으로, 그리고 실험은 장르/매체 융합의 안전한 몫으로 넘어간 것 아닌가.


<강연 A Lecture>(이행준+유운성): 장치로서의 영화



필름이 영사를 하는 사람의 매개를 감추지 않는 가운데 영사 장치에 의해 돌아가고 있음, 어둠 속 목소리가 시간의 흘러감을 상기시키며 외화면 목소리로 스크린과 별개로 그 자체로 흡입되며 퍼져 나가는 영화적 경험으로 현상되고 있음은 영화 바깥에서 영화적 비영화가 탄생하는 지점을 상정한다.


끝에 밝히는 이 텍스트의 모티브‧원안을 제공했던 사람들처럼 이는 하나(한 사람)의 퍼포먼스의 재현‧오마주 형식을 띠고 있는 가운데 하나의 목소리로 순일하게 믿게 할 만큼의 텍스트 직조의 재창작 형식이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색과 그것으로부터 색을 지우며 형태를 만들어 그 형태가 지표로서 상정하는 것들이 하나의 주제이자 내용이 되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성찰은 근본적이라는 점에서 또한 어둠 속 동굴의 경험을 공유한다는 (곧 시원적이라는) 점에서 어떤 의식을 치루는 것 같은 경건함이 묻어나는데 이는 영화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화적 경험을 하는 것에 대한 감동의 측면에서 기인하는 것일 것이다. 결코 빠르지 않고 하나의 리듬을 순일하게 유지하며 한 번도 더듬지 않는 말을(만약 대독이라면, 유연한 번역과 윤색이 적절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면 이는 과연 가능할까) 어둠 속 공명과 영화에 대한 확신으로 치환하는 퍼포머의 기적 같은 목소리로부터 역시.


<김구림의 그림자>(권병준): 비인간의 비자리의 비현존



얼굴에 투영된 가면은 얼굴과 완전히 겹치지 않으며 얼굴을 변형시키며 비인간의 그것을 만든다. 동시에 마이크에 대고 노이즈의 단편을 제공하고 떼고 가면-얼굴을 만들며 이 노이즈 사운드와 절합되며 사운드-이미지 환경을 구성하고 그와 간극을 낳는다. 곧 구성적 환경에 시차적으로 적응하며 균열을 낳는 절합이 반복된다. 


이는 미리 생성된 영상이 아니라 영상을 변용하며 그제야 완성하는 얼굴 대기라는 선택적‧수행적 현존으로부터의 현전이며 어디에도 실제의 얼굴은 없는 대신 왜곡된 비인간의 여러 타입들만 남기게 된다.


 피리를 불되 노이즈로 치환하는 실제 가면 쓴 존재의 등장과 자리에 물러서서 손전등으로 전시장의 작품 걸린 곳 가를 밝히며 돌아다니는 권병준이 처음의 자리에서 만나며 합주와 변형이 절합된다. 


가면들 사이로 잠재해 있던 ‘권병준’은 유동하며 ‘안착되지’ 않는 자리에서 이탈하며, 아니 그 잠재에서 혼으로서 유체이탈하며, 원래 없던 자리에서 전시의 외재적 원래의 자리를 호출하며 가상 가면에서 실재화된 가면 그 자체의 존재로부터 사운드를 이끌어 내며 변신의 거듭 제곱을 구현한다/변신의 자동 기계를 체현한다.


<칠보시(七步詩), fullbore metal version>(양아치): 그림자-주체들의 머뭇거림



사실상 서사의 부분들로서 궤적을 잇고 있지만 그 내용은 파악 불가하다. 비치는 것에 대한 인상 비평만이 가능하다. 어떤 인상이 남았다는 전제 아래, 그럼에도 그 인상에 관한 것은 비치는 것이란 것, 곧 어떤 현상의 그림자를 단지 바라보고 있었음이라는 공연의 주제와 상응하는 부분에서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판자를 든 남자는, 북을 치는 남자, 몸-집으로서 공간에서 두더지처럼 튀어 나와 방언 수준의 언어를 읊는 여자, 뒤에서 사운드를 조작하는 누군가는 눈부신 빛의 명멸 아래 그림자로,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붙박인 채 비-인간의 전형이자 우화나 만화의 캐릭터 자체로 소급되고 있다.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으며 이는 각자의 자리에서 ‘재생’되는 것에 가깝다. 곧 24프레임보다 느린 속도로.


머뭇거림의 움직임, 흘러가지 않으며 멈춰 있되 비트 단위로도 소급되지 않는 정동 자체를 지운 움직임은 리듬으로 산화되지도 않는 차원에서 비-인간의 비-춤이다.


 1장부터 장의 단락과 순서가 부여되는데 이는 단지 그 순서의 명명에 의해서만 그것을 인지할 수 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어떠한 서사의 궤적을 구성해 나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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