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3.09.28 00:46


▲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 [사진 제공=국립극단] (이하 상동)


<알리바이 연대기>는 아버지와 아들의 시차적 삶의 재현을 한국 근현대사의 연대기의 큰 흐름으로 두는 가운데, 회상으로써 순간적인 에피소드들로 과거와 단절된 일상의 영속된 시간 안에 과거로부터 현재를 다시 깁는다. 이 회상의 형태가 현재에 머물러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과거의 현전으로 나타나며 이는 현재를 재구성하게 된다.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체험하며 혼합된 시간을 경험하는 역사 탐험의 교과서적 만화를 보는 것 같은 매체의 전이가 느껴진다.


 이러한, 과거를 재현하는 이야기 형식‧현전의 양태‧혼합된 시간으로서의 측면은 <알리바이 연대기>를 그야말로 현재와의 연대를 맺는, 현재로부터 출발한 나아가 과거까지를 다루는 연대기가 되게끔 한다.




 박정희와 동시대를 산 김재엽 연출의 아버지의 실제 일화‧(아버지의‧김재엽 연출의)기억은 죽은 그리고 박제화된 박정희의 모습이 아닌, 어린 박정희의 만질 수 있는 인물로 생생하게 그려지는 한편 어린, 김재엽 아버지의 경험을 타고 오는 기억과 추억의 영역에서(이른바 지리적‧시대적 공통감각을 공유한) 친근한 존재로 그려지게 된다.


 아버지가 삽을 푸며 대지로부터 착실한 땀의 희망 서사를 길어 올리는 찰나는 박정희의 쿠데타 발발 직전이다. 이는 극 바깥에서 역사의 실재 앞에 무기력했던, 무기력한 우리를 (재)확인시키는 한편 무엇보다 미약한 희망의 두께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그야말로 미약하게 존재했음을 드러낸다. 이는 단지 그 이후 미약하게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진다. 


 <알리바이 연대기>는 그 질곡 어린 역사를 개인사‧가정사의 측면에서 세세하게 바라보며 두루뭉술하게 거시(巨視)를 더듬으며 현재와 만나는 지점을 설파한다. 사회주의가 빨갱이라는 공식, 정치에 지역 색이 견고하게 자리함을 보여주는 것 등은 그것의 발원 지점을 명시하기보다 그러한 과거 속 자연스런 흐름이 현재의 특정한 것, 여전히 지속되는 어떤 부분에 그치지 않음을 또한 보여준다. 곧 과거는 과거를 되짚고 현재를 지시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죽음은 어린 김재엽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루 종일 들려온 클래식 음악은 애도(배경 음악) 바깥에서 사유할 수 없었던 시대적 암흑, 블랙-아웃된 당시 정경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는 막연한 슬픔보다는 상상할 수 없는 부재의 현존 같은 것으로 지금의 그리움 내지 증오의 감정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역설적으로 ‘선글라스의 암흑’이 가렸던 시선은 ‘올림픽과 민머리의 광채’와 함께 한층 밝아진 눈부신 시대의 급격한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경찰서에서 전두환을 욕하던 김재엽의 젊은 시절 형의 모습에서부터 드러난다. 무대는 한층 밝아진 느낌이다.


 이는 한편 도무지 데모와 같이 집단적이고 표면화된 저항을 하는 것이 불가했던, 마치 민주주의를 로맨티스트의 입장에서 열망하고 소원했던 아버지 세대와 술 먹고 거드름피우며 욕하고 또한 공개적이고 저항적 투사의 측면에서 싸우던 김재엽 형의 세대의 분명한 간극을 나타낸다. 


그것이 적확한 민주주의건 아니건 아버지가 꿈꾸던 다른 나라에 대한 열망은 변형되고 은폐되며 잠재해 있는데, 이러한 측면은 도서관에서 일을 하고, 이상하게도 외국어 공부에 대한 열망이 있는 것과 연관을 지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곧 외국은 이상(idea)이며 책은 숨겨져 있는, 이 현실 바깥의 매혹적 진리가 담겨 있는 시차적 시공간인 셈이다. 곧 외국어와 책은 모두 현재적인 것이 아닌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과거적인 것이며 또한 미래적인 것이다. 언젠가 이곳이 아닌 저 다른 곳에서 살 것을 열망하며 동시에 이 책에 적힌 진리가 미래의 누군가에 의해 자연스레 읊어질 것임을 생각하는 측면에서.


 <알리바이 연대기>는 알리바이가 ‘권력의 언어’임을 전한다. 진실을 드러내는 대신 거짓과 잘못을 위장하며 유예하고 은폐하는 방식으로서 알리바이는 진실을 뭉개 버린다. 알리바이의 연대기는 구체적으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그리고 그 이후의 끝없는 연장선상에서)의 이어짐이며, 권력의 속박으로부터 아버지와 김재엽 두 세대가 현실을 부정하며 또한 살아 나가는 것의 미약한 자의 그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버지가 김재엽에게 전한 ‘사람 많은 곳에 서라!’라는, 바꿔 말해 줄을 잘 서야 하며 결코 튀는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하는 이론(異論)이 없는 개성 없는 자에서 더 이상 드러내 놓고 벌이는 저항이 아닌 소극적 침묵, 관심 없음의 침묵, 웅얼거림과 조소의 언어로써 권력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벗어난다. 가령 김재엽의 형, 그리고 광주의 투사의 한 전형으로서 등장인물과 달리 김재엽은 거기에 심드렁한 편이며 자신의 현실과 명확하게 분간하고 있다.


 과거의 가장 큰 그림자, 박정희와 고향 동료이자 친구 격인 아버지의 죽음은 비장하고도 길게 그려진다. 거의 죽음의 순간을 현재의 시간으로 잰다. 아버지는 어느새 친근하거나 어려웠던 모습이 아닌 ‘타자의 얼굴’로 변해 있다. 


일방적으로 바라봐 보이는 이 얼굴은 내 시선을 끊임없이 빼앗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내 시선(얼굴)을 돌리는 것 외에는 별다를 방법이 없음을 가리키는 반면 내 얼굴이 그를 따라 사라지는 그런 순간 잘 들어야 한다는 “선생님 말”이 대타자, 부모, 국가가 아닌 무언가 바로 옆에서 이끌어 주는 얼굴로서, 아니 그 얼굴을 지우고 남으며 나를 채근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그 말은 무엇일까. 이 제 3의 영역은 도착된, 또 오도된 책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곧 진리의 이름, 연대의 측면에서 생성되는 공통감각이 아닐까. 


아버지가 이 무대 전체를 관객을 환유하며 돌 때 그는 무대 세트에 가려 보이다 말다 한다. 곧 내 등 뒤에서 나타나 내 눈 앞에서 사라지는 이 착시적‧시차적 현전은 과거와 현재의 뒤섞음이며 결코 과거로도 현재로도 존재하지 않는 우리 삶의 역동적이고 기이하며 환영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이 아버지는 역사의 자국으로서 현재를 깁는다. 나(김재엽)는 그를 뒤에서 따르며 과거를 현재로 현재를 또 다른 과거로 바꾼다. 이 연대는, 과거로부터 현재로의 이어짐은 알리바이가 고착화되지 않는 유일한 하나의 방법론인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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