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3.05.14 01:04

확장 실험



스페이스 오뉴월을 소재로 그 일대 성북동 선잠로 교통섬 일대에서 벌어진 <2013 오뉴월 MAY FEST>는 자율적 참여와 제한 없는 참여로써 이뤄졌다. 이는 별다른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 ‘공공적 영역’을 점유한 ‘갤러리 공간의 확장’의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스페이스 오뉴월은 이번 행사에 크게 세 개의 프로그램을 마련했는데, 먼저 'Let's Hang: Whatever you can carry'는 별도의 심사 없이 누구든 작품을 들고 와 걸 수 있게 했다. 두 번째로 '2013 BYOB Seoul'은 'BYOB'(Bring Your Own Beamer)라는 전 세계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영상 작품과 프로젝터, 플레이어를 직접 가져와 상영하는 미디어 아트 축제의 콘셉트를 차용했다.

 

이는 2010년 베를린에서 시작돼 런던, 뉴욕, 도쿄 등 세계 각지에서 100여 회 이상 치러지며 지역과 예술의 접점을 마련하는 국제적 아트 이벤트의 성공 사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뉴월 버스킹!(O'NewWall Busking!)'은 젊은 음악가들의 공연과 사운드 퍼포먼스로 꾸며지는 프로그램으로 전시와 영상이 중첩되는 가운데 마련되는 축제의 정점이자 완성이다.

 

이른바 멀티미디어 전시·영상·공연의 결합형 축제는 공공적 영역을 의미로 치환시키는 능동적인 주체의 영역과 동시에 수동적인 대상의 영역을 상정하는 ‘공공미술’의 출발점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107팀의 작가/예술가들이 일시 점유한 ‘공공적 영역’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자유로운 참여와 기회의 장으로서 전유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소성의 맥락'




이 속에서 이 영상들은 가령 그것들이 갖는 환경(이 성북동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서의 특정한 위치 지음의 차이 발생을 포괄하여)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큰 사거리 부동산 건물에 비춰진 영상에서 나오는 인터뷰 영상이 구성하는 서사는 현실의 맥락과 일상의 자리를 상기시키고, 갤러리 반대편 도로 너머의 이층의 빨간 벽돌에 투사되는 세 개의 영상 중 특히 가장 좌측의 화면의 사물의 변용태는 벽돌의 그라데이션과 결부되어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What a wonderful world’는 제목의 원곡 자체가 다른 분위기로 재편된 새로운 곡으로서, 작은 스피커 속에서 흘러나오며(이는 많은 영상 작업들 가운데 그곳에 도달해야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긴 고깔 모양의 특정한 사물이 반복적으로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이미지를 찍은 영상이었는데, 영상 바깥으로 지나가는 자동차와 바람소리를 결코 배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외부 사운드를 차단하기 위해, 그리고 사운드 자체를 영상의 중요한 일부로 드러내는 작품의 경우에는 헤드폰이 마련되어 있기도 했다.


미시적인 감각으로 잡힌 사운드 스케이프라 할 수도 있고, 짧은 수행적 퍼포먼스의 부분들의 합산과도 같지만, 사물에 닿는 행위 자체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한편 “영상시”라고 스스로 명명함과 함께 이 소리를 일종의 음성, 지표 그 자체의 의미로 바꾼다는 데 그 특이성이 증가된다. 쉽게 말해 이 사물을 닿는 행위는 소리를 내는 측면에서 합목적적이며 이 소리는 일종의 시의 기표 그 자체인 것이다.


부동산 옆에 잡힌 예전 오뉴월 자리에는 임대가 되지 않은 빈 공간으로 남은 채 여러 개의 영상들이 투사되고 있었고, 하나의 영상은 노란색 테이프로 긴 프레임을 휘감아 내는 퍼포먼스가 빠른 속도로 벌어지는 가운데 이를 네 개의 분할된 화면을 담았다.


이는 완성이 아닌 진행 중의 측면이라는 점에서 작업에 따른 축적됨의 시간성을 상정하지만 동시에 시간의 축적 자체를 확인할 수 없는 어떤 결락들의 파편적 결합 같은 느낌을 준다. 곧 영상의 시간과 실제의 수행적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영상이란? ‘보여지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 



꽃집의 골목을 왼편으로 끼고 틀어졌던 또 다른 영상 작업인 ‘보여지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 는 두 사람이 얇은 강에 들어가 만났다 사라지며 계속 강 저편으로 사라지는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 


강은 투명해 보이는 듯하지만 실은 불투명한 캔버스의 일부로 일부 잠식해 가며 하반신의 신체를 감추는 이 두 사람 사이를 규정할 무엇도 없음을 제목이 말해준다. 일종의 자기 지시적이고 자기 소급적인 제목은 언어적 결락을 보여주는데, 두 사람이 강을 지나감은 피터 브룩의 『빈 공간』에서 두 사람이 지나감을 다른 한 사람이 바라봄이 성립할 때 연극의 정의가 생겨나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는가. 


그럼에도 서사는 이 영상의 단락, 연속적인 상 가운데 멀어짐과 가까워짐이 불연속적인 사건으로 발생하는 가운데 한없이 자연을 전유하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는 듯하다. 퍼포먼스 과정과 결과, 영상의 반복적 단락 짓기에 의해 시간을 담는, 동시에 시간 외의 것으로까지 유추를 가능하게 하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사적인 관계의 신비함과 단순함이 갖는 또 다른 신비함의 층위를 드러내는 가운데 ‘의미’가 발생한다. 


재기발랄한 영상들



재미있는 영상으로는 사람 위에 프로젝션을 쏘는 영상일 것이다. 스페이스 오뉴월 건물의 옆면에 투사되던 이 영상은 일종의 ‘이미지-신체’의 절합된 동적 이미지가 탄생함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신체는 곧 두 개가 절합되는 시간 속에서 일정 정도의 떨림을 안고 있고 동적 움직임의 안착될 수 없는 딜레마로서 신체를 일정 시간만 유지하게 된다. 


오히려 퍼포먼스는 신체로부터가 아닌, 그것을 정확하게 맞출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프로젝션을 다루는 (결코 영상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서 비롯된다라고 하겠다. 


갖은 크기의 나무의 둘레에 훌라후프를 돌려놓는 영상, 바람에 저절로 날려 가는 불가사리의 모습의 영상 역시 조종함의 존재를 보이게 하지 않는 가운데 뭔가 수행되고 있음, 존재되고 있음을 비춘다는 점에서 앞의 영상과 같이 흥미롭다.


'포화 시점으로부터'



스페이스 오뉴월 공간 자체의 전시물들은 의미를 형성할 듯하면서 그 의미를 벗어나는데 사실 어떤 의도의 맥락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의 관계 맺지 않은 그 자체로 있음의 어떤 원래의 콘셉트는 다닥다닥 붙어 자기만의 틀을 허락하지 않음으로 인해, 어떤 ‘불가피함의 연관성’을 맺는 듯 보인다. 


하나의 틀이 있다면 이들 작가의 작품들을 결코 크지 않은 이 공간 안에 다수 작가의 작품들의 분절적 배치 그 자체에 의해 약간 정도의 틈만을 허락하는 가운데 모나드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일 것이다.


이틀째의 경험만을 했고 이는 전 날 전시 오프닝이 있었고 그것과 더불어 영상이 극장 바깥에서 설치되었던 것으로, 삼일 째는 여기에 밴드들의 공연이 덧대어진다고 한다. 거의 갤러리 바깥으로의 확장으로서, 동시에 장르의 경계를 넘는 확장이다. 그리고 그를 통한 시차적 중첩과 ‘포화의 미학’인 셈이다. 이 포화 속에 예술의 비제도적 영역과 비상업적 영역의 어떤 ‘과잉’이 있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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