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3.04.21 04:13

<무대 공포>를 보는 균열의 지점 


<무대 공포> ⓒ 서현석 


<무대 공포>는 극장은 블랙박스(암흑 공간)라는 정의를 축자적으로 구현해 내는 데서 출발한다. 곧 오롯한 이 어둠에 빛이 투영되어 죽음에서 삶을 탄생시키며, 무에서 유를 일시적으로 창출하는 마법술의 공간으로 기능을 하는, 작위적이고 그래서 특별한, 어떤 장치적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지점에 맞닿은 채로.


이는 다시 극장이 야외가 아닌 실내로 들어오고 조명(빛)의 발명과 발전에 맞춰 ‘현재의 극장’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졌음을 상기시키며 ‘극장 발생’의 시원적 지점을 메타적으로 성찰하게끔 한다. 가령 프로젝션을 통해 몇 개의 흩날리는 실크 스크린을 투과하는 문장들을 환영 자체로 드러내는 장면 같은 경우는 장치의 개념과 이 장치를 가능케 하는 어둠으로서 무대를 정의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어둠은 내면이라는 인간에 대한 은유로 작동하며 우리가 평소 마주할 수 없는 불가능성에의 지점을 마주하게 하는, 그래서 근원적인 ‘공포’를 일으키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무대 공포>는 현재의 연극에 대한 시원적 지점을 상기시키는 연극에 대한 메타적 지점과 환영적 실재를 그야말로 실재로 보여주며 외상을 치료하는, 나로부터 출발해 나에게로 환원되는 관객 주체적이며 수행적인 작업 사이에서 시차를 발생시키며 존재한다. 한편 이 과정을 이루는 텍스트들은 차연으로 기능하는 단어들, 라캉의 거울 이론 등 레퍼런스의 기시감 어린 차용의 애매모호한 변주로 또 다른 메타 텍스트의 면모로 가세한다. 


‘메타 연극’, ‘공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효과’, ‘기시감 어린 텍스트’라는 삼항조는 이 연극을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꽤나 혼란스럽게 한다. 


꽤나 의도적인 것들의 조합, 튀어나옴으로 느껴지면서 이 ‘의도의 과도함’에 대한 것은 그야말로 과도함일까. 물론 이는 연출이라는 가상의 존재에 대한 의도(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극 내부의 초자아 자체로 기능하게 하는 것에 단 하나의 그 의도 아닌 의도가 머물 것이라 생각하게 하지만.


관객의 반응은 대체로 두 부분일 것 같다. 텍스트에 묻혀 버리거나 텍스트는 별 다른 의미가 없는 구문들이라고 의도적으로 보지 않거나. 전자는 의미를 읽지 못함, 후자는 의미를 의도적으로 포기함이라는 데서 작품 읽기의 실패일 것이지만, 이는 거꾸로 이 작품의 의도의 과도함이 의미의 과도함으로 수렴되는 부분은 아닐까.


장치 1 : 외화면 목소리


연극은 꽤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다(이 작품이 페스티벌 봄에서 가장 빨리 매진된 이유이기도 하다). 스크린(막) 앞에서 텍스트를 읽는 여자는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기하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곧 의도된 어둠을 가리키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외화면 목소리에 입을 맞추는 것이다.


목소리를 저당 잡힌 자동 기계 인형 내지는 단지 입만을 뻐끔댈 뿐 실제 기능하지 않는 입 곧 외부적으로 공명될 뿐인 일종의 가면을 쓴, 음성의 출처에 대한 이미지가 포함 안 된 아쿠메스트르(acousmêtre)를 나타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전자라면 초자아의 공포를, 후자라면 이 시선을 맞추지 않는 존재 자체에 대한 규명의 필요를 부추기는 가운데 공포를 일으킨다. 


나아가 이를 수용함은 또한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공포 그 자체의 환유와 단지 스피커의 의도된 배치라는 장치의 극장 은유 사이에서 시차를 발생시킨다.


연극이 성립하는 과정은 순차적이다. 우선 연극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피터 브룩의 유명한 『빈공간』에서의 연극 성립의 비유, 스즈키 타다시 등 연극의 레퍼런스 몇 개를 추출한 뒤 ‘가’는 관객이고 ‘나’는 배우로 상정되며 일이막이 진행되는데 배우는 배우임을 당연시 은폐하며 일막은 관객의 연극으로 진행된다. 


배우가 배우가 아님은 실은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고 이 보이지 않는 존재의 목소리는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곧 관객의 내면에서 빚어지는 목소리가 우리의 의식보다 앞서 존재함)을 가정한다. <무대 공포>가 메타 연극일 수 있는 것은 연극의 최소한의 재료들을 (재)정의한다는 데서 물론 찾을 수 있다.


극 출현 : 관객, 배우, 극으로의 절차


‘가’가 관객임은 ᄀ이라는 자음의 인접성이 있지만 ‘나’는 배우임은 내가 배우라는 언어유희를 가볍게 통과하며 이막 역시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서, 그리고 결국 배우가 아닌 관객(의 감상)만이 있다는 것으로 극을 이끌어 낸다. 


어차피 배우들은 이 초자아 같은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 대한 수행적 장치(목소리를 실행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진)일 뿐이다. ‘가’에서 거울을 ‘나’에서 구리거울을 제시하는데 전자에서 인간이 거울 단계에서 모방을 통해 욕망을 가진 (재현하는) 배우가 됨을 제시한다면 후자에서 비치지 않는 물 자체의 (현존의) 배우가 됨을 의미한다.


거울이 반영과 투사의 기제로 필연적으로 그 사이에서 간극을 가져오는 데 반해 구리거울은 애초에 불투명한 매체로서 시선을 거두게 한다. 내지는 안으로 돌리게 한다. 


일단 관객과 배우의 균열에서 빚어지는 연극에 접근을 막 시도한 관객에서 애초에 그 균열을 노정하지 않은 배우로서의 관객(이미 ‘나’가 배우인)으로의 환유적 전환 이후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관객이자 배우가 된다. 


뮤지컬은 옛 팝송 ‘다이아나(Diana)’를 늘어뜨려 아득하고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곧 어떤 시차 자체를 품고 불명확하게 전달되는, 음원을 음향으로 바꾸는 곡(뮤지컬의 중심이 되는 노래로 제시되는)과 스트로보 조명에 탭댄스를 장면 장면으로 분할한 춤을 절합시켜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테이프를 늘어뜨려 놓는 효과를 창출하는, 그리고 그 음향을 의도적으로 확대시켜 분위기의 고양, 곧 클라이맥스를 이뤄내는 절차는 서현석 연출의 기존 무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관습과도 같은 것이기도 하다.


환영-실재 : 거울에서 거울 너머로


 한편 휘날리는 스크린(막)은 바깥에 보이지 않는 외부를 상정하는 동시에 이 일부만을 보여주고 일부를 가리는 스크린은 거울 단계에서 파생된 금이 간(균열이 난) 주체가 파생됨을 또한 가리키는 듯 보인다. 조명이 꺼졌을 때 이 장막은 쳐지고 은근하게 곰 인형이 위에서부터 미약하게 물줄기를 받아내는 장면이 보이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외부가 (우리의 내부로서) 드러나고 이 곰 인형은 금 간 주체 우리 자신이 아닐까.


 지금까지가 거울을 보며 배우가 되는 관객이라는(텍스트에서 출발한) 존재가 실제 거울을 마주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하나 빼기’를 통해 이기거나 진 뒤 받은 스마일과 울상의 두 표정이 앞뒷면으로 있는 명함 크기의 화이트-블랙 카드(인생은 희극 아니면 비극이라는, 내지는 모 아니면 도라는 은유를 작동시키는)를 받아들고 저 거울 너머로 이동한다. 


 관객은 이제 관객-배우 놀이에서 진정 관객으로 돌아가며 관객이었던 순간을 상기한다. 일종의 관객으로서의 배우였음을 또한 상기한다. 이미 지나간 것이고 우리는 반대편(을 설사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고 해도)이 기능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그 과거를 다시 연극으로 소환하는 것이다.


 이는 탭댄스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동하고 채 이동하지 않은 관객을 우리의 모습으로서 바라보고 있는 전환의 순간으로 인한 것이다.


유예된 마지막


 극은 이 거울(내면)의 현실(무대)로의 반전에서 제 삼막을 기약하는데 무대 바깥으로 나감으로써 탭댄스를 지켜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공교롭게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가 이 춤의 연장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여 스펙터클이 의도적으로 작동된 듯했다.


 탭댄스를 추는 이들은 일종의 박수를 완성하는, 곧 박수 자체가 극의 완성이라는 규약을 알려주는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장치된 것 같다.


 한편으로 줄을 서서 백성희장민호 극장의 반대편 입구, 평상시에는 관객의 입구로 사용되는 곳이 아닌 입구를 따라 들어가는 체험식 시작을 했기에 수미쌍관을 이루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뒤따른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무대라는 실재-환영을 다시 (끝까지) 상기시키며 이 극을 현실로, 실은 이미 실재-환영으로 인해 변화된 의식의 시선 아래 있는 현실로 돌리며 극의 마무리를 시차적으로 만든다(이미 끝났는데 다시 끝을 내며 그 끝을 돌아보게 하며)


 실재에 가닿는 충만함의 환영에서 환영이었음을 보여주는 텅 빔의 실재로 이동하는 과정은 이미 그 전환 이후 끝에 도달했음을 인지하게 했지만 이렇게 그 끝으로 돌아가며 시차의 시간들의 연장선상에서 극은 마무리된다. 


 앞선 실재-환영은 그런 의미에서 치유보다, 되돌아감의 지점에서 균열, 외상의 지점을 안긴 것이 아닐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Buzz this
me2DAY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mikwa@naver.com

[예술 현장에 대한 아카이브와 시선, 온라인 예술 뉴스 채널 Art Scene]
<Copyright ⓒ 2009 아트신 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