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3.04.14 22:47

오는 6월 23일까지 아트선재센터의 기획전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컬렉션》이 열린다. 전시 제목인 ‘더 완벽한 날’은 실비 블로셰의 영상 작업으로, 미국 대통령 후보 시절, 버락 오바마가 했었던 유명한 연설을 바탕으로, 오바마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내용을 노래하는 한 뮤지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유토피아'라는 주제어를 가지고 유럽의 현대미술관 '무담 룩셈부르크 (Mudam Luxembourg)'의 550여 점의 소장품 중 동시대 미술가 23명의 설치, 회화, 사진, 비디오 작업 등 30여 점의 작품을 선별했다. 


12일 전시 오프닝 프로그램으로, 무담 룩셈부르크의 디렉터 엔리코 룽기가 참여한 토크 프로그램과 함께 상영된 앙트완 프럼과 장-루이 쉴러의 영상 작품을 살펴 본다.


장-루이 쉴러, <Chungking Dream>


▲ -루이 쉴러 Jean-Louis Schuller, <청킹 드림 Chungking Dream>(2008), Film super 16 mm transferred to video, 17 min, Collection Mudam Luxembourg still : Jean-Louis Schuller


<Chungking Dream>은 홍콩에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일상의 단편들과 도시의 큰 그림이 대비되는 가운데 중간 중간 집어넣은 인터뷰를 통해 세계화에 대한 질문으로 묘연한 대기를 꿴다. 


세계화는 좋은 것이냐의 단순한 물음은 팔십 퍼센트만 좋은 것이라는 식의 대답으로 이어진다. '이십 퍼센트의 부정'과 '대체로 좋음'이라는 단순한 견해 차이로 좁혀지는 가운데, 이십 퍼센트에 대한 이야기 또는 비춤은 묘연한 숙제로 남겨지게 된다. 


클로즈업된 얼굴과 소리, 그리고 숏들이 분절되어 결합되는 탓에 이러한 현장은 활기를 체험하게끔 하지만 잘 조망이 되지 않는다. 이것에 비해 거대한 빌딩들을 높은 곳에서 바라본 신을 (매끄럽지 않게) 분절적으로 접합하고 꽉 차 있는 사운드의 대기를 병치해 이러한 현장이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을 안긴다. 


이는 곧 폭발할 것 같은 세계화에 대한 일종의 은유인 셈이다. 그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초과 적중되어 두 사람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는 장면은 역시 명확한 관계성 없는 하나의 짧은 컷으로 매끄럽지 않게 넘어가는데, 이 역시 모두가 탑승할 수 없는 한정된 자원의 몫과 치우친 몫에 대한 적절한 은유가 된다. 


그럼에도 현장의 생기 어림의 포착은 후반의 신은 폭발할 것 같은 대기 속에 치솟아 있는 빌딩들의 기약할 수 없는 시간대로 들어감으로써 세계화는 고르지 않다가 아닌, 결코 완전한 세계화는 있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솟아오르는 가운데 유예되는, (그럼에도 끊임없이) 잠재하는 묘한 세계화의 늪으로 보는 이를 빠뜨리고 마는 것 같다. 동시에 그 늪은 시간을 알 수 없는 묵시론적 징후이기도 하다.


앙트완 프럼, <Mondo Veneziano, High Noon in the Sinking City>


▲ 앙트완 프럼 Antoine Prum, <몬도 베네치아, 침몰하는 도시의 한낮 Mondo Veneziano, High Noon in the Sinking City>(2005), 35 mm film transferred to HD video, 33 min. Collection Mudam Luxembourg  still : Antoine Prum


<Mondo Veneziano, High Noon in the Sinking City>은 베니스 야외를 배경으로 화가(painter), 명랑한 예술가(convivial artist), 이론가(theorist), 큐레이터(curator)로 미술계의 주요 생산자의 입장에 있는, 대표성을 띤 이들의 낭독 연극식의 진행으로 이뤄지며, 미술계에서 진행되어 온 담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러한 설정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따라서 작위적이다. 배우들은 텍스트를 읽는 담론 자체이면서 하나의 위치를 재현하는 보편적이면서도 불특정한 입장이므로, 동시에 이 현실을 그저 배경으로 차용하는 셈이므로 이 현실은 하나의 무대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복잡한 여러 쟁점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이 담론의 교차는 이 무대가 일종의 라운드테이블로 볼 수 있게 한다. 


화가는 작품과 상관없는 식의 가령 디제이를 오프닝에 부르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회의적으로 나타내고, 명랑한 예술가는 이러한 측면이 총체예술이고 관람자들에게 개방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식의 입장을 낭만적으로 전한다. 여기에 이론가의 실존주의 따위의 여러 철학적인 명제들이 섞여 들어간다. 


또 다른 충돌로 명랑한 예술가가 현재 이 담론들의 진행 과정이 일종의 협업이자 과정 차원으로, 예술의 중요한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식의 의견에, 화가는 이는 단지 각자의 이야기들을 전하며 얻는 집단 치료의 성격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화가 진행됨으로써, 이 라운드테이블을 예술의 담론이 생성되는 장으로 두는 동시에, 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두고, 나아가 이에 대한 차이의 의견을 전함으로써, 메타적으로 극 자체를 반추하는 동시에 예술 자체의 형상화에 대한 우화로서 이 작품을 보여 준다.


여러 살인들이 등장하는데 각 다른 입장과 위치를 대표하는 이들의 의견이 결코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의 극단적인 은유인 셈이다. 화가는 이론가의 눈을 찍어 사실상 죽인 후에 이를 캔버스에 문대 피로써 드로잉을 하고 이를 스크린에 투사한다.


큐레이터는 화가와 명랑한 예술가를 좇(쫓)고 총으로 싸서 죽인다. 뒤에 죽는 명랑한 예술가의 죽음까지는 긴장 어린 대기가 흐른다. 이는 꽉 찬 묘연한 사운드의 대기로 인해 말 그대로 터질 것 같은 긴장을 야기한다. 


또한 명랑한 예술가는 눈 뜬 채 하나의 온전한 피사체로 자리한 큐레이터의 배를 갈라 배를 가르고 장기를 꺼내는데, 이는 중간 중간 붉은 색 머리를 한 채 붉은 색 스파게티를 먹는 것과 병치된다. 이는 충돌하는 의견에 대한 은유이자 배가 캔버스고 피가 물감이라 한다면 음식을 먹는 곧 제의라는 행위로 꿰어지는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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