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3.04.09 05:53

수행적 발화로 우선하는 말


▲ 제롬 벨 & 극단 호라 <장애극장> Jerome Bel & Theater HORA “Disabled Theater”, Michael Bause(The rest is the same as above.)


제롬 벨은 수행적 발화의 형태로, 무대에 직접 등장하지도, 나아가 내한하지도 않은 채 무대의 과정들, 곧 10명의 지적장애를 지닌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호라 극단 (Theater HORA)의 배우들을 움직인다. 곧 그의 말이 따른 뒤에 배우들은 행동하게 되며, 배우들의 행동은 그의 말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이 말을 전하는 이는 스위스 독일어와 제롬 벨이 사용하는 영어 사이에 교량 역할을 했어야 하는 그리고 무대에서 실시간으로 그 역할을 다시 해내는 통역사인데, 일종의 제롬 벨의 법정 대리인의 자격으로(실제 수행적 발화는 법정 용어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제롬 벨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반면 그는 그들의 움직임에 전연 개입할 수 없는데, 10명의 배우를 그 자체로 세우기만 하면 되는 동시에 그 자체로 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움직임을 제약하거나 동작들을 일일이 짜준다면, 심각한 윤리적 결격을 낳기 이전에 이미 투명한 그의 안무 방식을 벗어나는 것이 될 것이다.


곧 그의 안무 방식은 배우들을 호명하고 무대 내 존재를 만든 뒤에, 분명히 현시되는 것이지만, 이미 예정된 지령에 따른 움직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일으키는 수행적 발화는 어떠한 내용도 담지하지 않은 하나의 텅 빈 순수 형식으로서 그 앞에서 작용하며 이후 움직임들이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상기시키게 된다. 더 정확히는 이 말은 말해진 직후 어떤 효과를 낳으며 사라지게 되어 있다.


과정의 투명한 드러냄



한편 이 말들을 통해 안무가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적으로 일종의 주문 형태로 개입한 사실을 드러낸다. 곧 이 말들과 이어지는 동작들은 이미 벌어졌었던, 어떤 동작들의 재현이다. 내지는 재현으로서 믿어지게 되는 것들이다. 곧 실시간의 측면은 안무가가 현장을 향하던 그 말의 측면으로 다시 관객에게 다가오며 객석과 무대의 간극을 지우게 하는 동시에 완성에 대한 개념 자체를 지운다. 


곧 그의 수행적 발화가 하나의 순수 형식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시간 사태를 일으키는 법인 동시에, 단지 (미적인 완성도를 보여준다거나 하는 식의 개념에 기댄, 내지는 어떤 동작들을 고도로 정제화해 보여줄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어떤 움직임의 순서와 무엇이 따를 것인가 만을 지정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극단 호라의 배우들의 몫이고, 그들 삶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는 오로지 틀만을 짤 뿐이다.


이로써 그는 도제적 안무가의 짐을 벗고, 안무가로서 무용수들에게 초자아로 군림하는 위엄도 떨쳐버리며, 단지 메타적으로 안무를 가리키고, 투명하게 그 틀을 제시할 뿐 이 춤이 아름답다거나 진리라는 식의 강변을 늘어놓는 것에서도 벗어난다. 


또한 만드는 과정 그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제시한다. 현시된다지만 많은 재현들이 이미 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천진난만해 보이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에서도 읽히는 어떤 능숙함이 그 시작과는 시차가 조금 있겠다는 감을 들게 하는 측면이 충분히 있다.


만드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은 한편, 만들고 수정해 가며 발전해 가는 공연 전반의 과정 자체를 공연에서 순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가령 공연에 대한 느낀 점을 듣는 순서에서, 먼저 6명의 배우만 선정한 것에 대한 솔직한 불만도 듣는다. 이에 앞서 물론 6명의 각기 다른 춤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곧 4명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어짐으로써 그 불만을 기쁨으로 승화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실은 전 과정이 모두 준비된 것이므로, 이는 마치 지난 시간의 과정을 새로 재현하는 형국이 된다. 그리고 이 불만을 듣고, 4명을 더 추가한 것까지 순차적으로 제롬 벨의 지난 작업에서 진행되었음을 추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재현이 현시로서 성립하는 것은 앞서 일종의 연기가 아닌 내레이터의 수행적 구문이 있고 그에 따른 분절을 겪은 후에야 이것이 실현될 것임이라는 것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제롬 벨의 텅 빈 형식의 말은 새삼 꽤나 큰 힘을 지니는 것이다.

 

호명에 따른 윤리의 성립 



처음 공연을 볼 때 1분간 관객들을 향해 있게 하고, 또 모두 배우인데, 굳이 직업을 소개해야 하는 과정들이 꽤나 지루하게 느껴지게 마련인데, 이는 그들을 한 명의 각기 다른 존재들로 현상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윤리적인 제롬 벨의 측면에 감동적 수사를 보낼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일종의 유형학적으로 존재 자체를 아카이브 하는 측면으로 응당 같은 시간과 자리를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이런 불편한 대면식은 오직 호명, 곧 그 사람의 자리와 고유한 가치를 불편하더라도 인정해야 하는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수행의 일환이 되며, 우리는 대화에서 상대적으로 느릿한 말투를 구사하고, 상대적으로 발음이 매끄럽지 않게 끊어지며 발생하는 시차를 배제하고, 그 대화의 시차에서 갖게 되는 또는 가져야 하는 인내심 같은 윤리적 태도를 이끌어 내(며 그럴 때만 그 익숙하지 않음의 시차가 공존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말의 간극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또 그저 상대적인 차이에 의한 것일 뿐이다.


한편 이 자신에 대한 호명의 시간이 따르기까지 각자는, 그리고 모두에게 해당된 하나의  과정이 끝나기까지는 이들은 기다려야 하는데, 음악이 무대와 객석까지를 한데 엮을 때는 지루함 대신 모두들 신나 하는 반응들을 보였다. 이는 한편으로 호명될 때에만 이들이 배우라는 것을, 또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것에 다름아니다.


신체의 무늬가 곧 춤



정작 먼저 선보인 6명의 춤은 꽤나 훌륭하다. 아니 그 훌륭하다 라는 말 자체가 어폐다. 굳이 그 음악 외에 감응된 신체와 그에 결부된 속도와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이를 뛰어나다 아니다의 개념의 판단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로써 춤에 어떤 정형화된 움직임이 있다거나 오직 배워야만 그리고 소수에게만 특권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다거나 하는 식의 판단과 대립한다. 이들의 춤은 신선하고 오히려 정형화된 무용수의 움직임보다 훨씬 더 나은 부분이 있다. 


기교에 너무 치중해 있다거나 추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의 춤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들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을 찾자면, 오직 제롬 벨이 그들을 호명해서 그들을 무대 위 각각의 자리를 갖는 배우로 세웠고, 그들은 정녕 배우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다면 제롬 벨의 텅 빈 주문은 위대함으로까지 고양된다). 


자신들이 가진 음악에 완전한 기쁨을 표하며 또 그들이 가진 신체 구조의 특징이 온 몸으로 전적으로 드러나며 움직임을 생성시킨다. 


이러한 자유로움과 동시에 능숙함은 오히려 이들이 무언가 변형과 훈련에서 오는, 무언가 더 완벽한 신체에 도달해야 하는 가정 따위를 애초에 갖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해서는 아닐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는 신체의 무늬가 곧 춤이 되었다. 그에 더해 음악이 추동하는 무아의 상태. 곧 이 음악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몰입하고 자신의 음악에 스스로를 합치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춤을 그 누가 쉬이 출 수 있는가. 이들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도록 다시 말해 그들이 관객이라는 것에 대한 부담 없이 춤을 출 수 있게 한 것은 곧 그들이 단 하나의 일회적 무대를 가질 수 있게 한 것에서 온다. 호명하고, 움직임의 자리를 주며. 


변증법적 (탈)개입을 통한 미학적 분별



그런데 그 모든 춤을 뭉뚱그려 좋다고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앞서 그들의 춤이 신선하고 뛰어나다고 한 것은 어떤 감동의 측면에서 곧 그들을 타자화하거나 미화하는 것과는 상관없다. 재미있게도 6명의 춤 이후에 제롬 벨이 은근슬쩍 넘어가며 뺀 4명의 배우의 춤은 별로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제롬 벨은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준다는 식으로 10명의 춤을 모두 올렸고, 그 춤에 대한 미학적 감각의 시선이 분명 작용했음을 드러낸다. 


이는 선별이라는 이들 개개인에 대한 비-윤리의 측면 이전에, 안무가로서 관객들에게 좋은 춤을 보여야 하는 것을 어기는 안무가의 비-윤리와 결부된다는 점에서, 제롬 벨은 이 불만의 편지를 다시 한 번 무대에 드러내게 하고(이에 대한 부분이 현시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앞서 설명했다), 관객이 그의 말에 동조해서 마침내 동의하에 4명의 춤도 볼 수 있게 되는 식으로 관객들 역시 윤리적인 선택을 하는 따뜻한 주체라는 생각을 스스로 가지는 가운데, 영리하게 자신은 여기서 한 발 물러나며, 관객이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을 자발적으로 한 것 같은 형국을 만든다. 


그리고 이는 지젝이 말한 ‘텅 빈 상징적 제스처’로, 누가 감히 그 4명의 춤을 거부하겠는가, 아니 거부한다고 말하겠는가. 사실 그보다 이들의 춤이 별로일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다. 그리고 이들 춤을 보며 드는 후회, ‘아 속았다!’


앞선 움직임들은 미니멀한 자족적인 춤들 한편 음악으로부터 활력을 전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곧 관객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의도한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어떤 춤이 더 미학적인지, 감동을 주는지를 제롬 벨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것들을 관객 스스로로 하여금 판단하게 만드는 것까지 나아가게 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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