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2.07.15 09:00

지난 7-8일 서울 성북동 일대에서 열린 극단 서울괴담의 <기이한 마을버스 여행-성북동>, 8일 공연 사진 (이하 상동)

전체적으로 극단 서울괴담의 <기이한 마을버스 여행-성북동>은 열린 형식으로 성북동 특정 지역 일대를 도는 가운데, 하나의 작품으로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예술가 집단의 작품들을 관객이 직접 이동식 체험을 통해 마주하며, 집단적 연대 속에 유사-추억의 내밀한 개별적 경험을 안겨주게 된다. 예술가들로서는 이 지역의 가상 주체로서 동화되어 관객들을 손님으로 맞는 식이다.

이 사방이 확 트인 공간, 바람을 맞고 마을의 정취를 체감하는 이 성북동 마을을 배경으로 한 공연은 예술가들에 의해 교란되고 교차되며 보이지 않는 도시로 새롭게 쓰인다. 처음 관객들이 03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운집해 있을 때 이곳에서 배우들은 마을 사람으로 동화되어 있었고 이질적인 모습이 아니었는데, 이 ‘친숙함의 소시민의 삶’이 주는 편안함에 대한 은연한 강제가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었다.

곧 이들은 우리의 평범한 듯한 삶에 따스한 시선을 겹쳐 넣어 비추며 희극으로 구현하는데 이는 마을 사람과의 동화 작용 또는 모방(미미크리)의 성격을 띠는 데 한정되기보다 오히려 보편의 정서를 암묵적인 윤리적 차원으로 제시하는 데 더 가까웠고 여기서 거리가 발생했다.

한편 이 마을이라는 것의 익숙함은 이미 우리에게 멀어진 타자이기도 하다(일종의 시대적 층위로서 또는 우리가 바쁜 삶에서 특히 도시 속에서 망각한 삶으로서). 우리 안의 타자인 셈인데, 이 타자와의 만남은 동화와 이화가 넘나드는 비정상적이고 이를테면 기괴한 언캐니의 영역에서 출현해야 한다.

여기서 현대인의 삶에 대한 비판의 시선과 우리네 삶에 대한 정감 어림의 따스함의 정서가 마을 주민들이 이 연극을 편안하게 보는 것의 그 바깥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위치를 조율해야 하는 관객에게로 소급된다. 하지만 이 현재가 보여주는 작품의 따스함은 관객과 주민들의 공통의 연대를 너무 쉽게 전제하고 마는 것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이 마을을 체험하는 것은 이 마을이 우리의 외부(우리가 어쨌거나 살지 않는)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외부성은 우리 내부의 다른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객들은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위치가 무대로 투영되는 대신 여전히 보이지 않는 관객으로 남겨지는 가운데 이 외부성을 향유하는 차원으로 마을을 문화 소비 차원으로 전유할 소산이 크다.

어쩌면 관객은 도시에서 이 순간의 극장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장소 특정적인 공연들의 생성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며 시선과 신체의 분리, 곧 스펙터클의 체험을 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하다면 첫 번째 판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네 삶을 비춤은 삶의 조건을 확인하는 것이자 나를 구성하는 것들을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동화 작용의 진릿값을 드러내는 가운데, 이화 작용의 비판적 현실 고찰이 적용되고 있는 무언의 연대가 시선의 두 층위로 분별되어 흘러가고 있었던 것 아닐까. 이질적인 것이 발생한다기보다는.

빈 집 안 할머니와 춤춤은 최고의 경험이었다. 마을 주민인 이 할머니는 도무지 공연자가 될 수 없는, 공연의 틀에 끼워지지 않는, 시선에 침잠되지 않는 실재thing다. 그 역시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시선의 은밀함을 또한 허락하지 않는다.

배우의 환영과 실재의 현실이 혼재된 양상에서 삶과 극이 교란되고 교차되는 이 순간에 극은 수행의 물꼬를 튼다. 여기에 배우 내지 무용수는 이 몸 자체가 무대고, 시선의 두께로 둘러싸인 바깥으로부터 전체의 시선과 함께 한 명의 시선을 선택하여 마주함으로 특별한 배우 만들기로 또 다른 시선의 층위를 만들고, 그리고 여전히 시선을 받는 가운데 배우의 위치를 유지한다. 움직임의 동선과 반경에 따른 무대는 관객의 직접적인 인터페이스 미디어가 된다.

배우와 관객 한 명, 한 명과의 눈이 맞을 때마다 그 무대로의 전이가 일어난다. 이는 영화 속 무도회장의 (중심이 된) 인물들의 요염한 날갯짓이기도 하다. 이어 사람 얼굴의 탈을 쓴 사자의 뒤를 따르며 신화가 마을에 내재화됨을 경험한다. 또한 집단 줄 서기로 그 뒤를 따르며 어린 시절 유희의 감성이 자극됨을 느낀다.

다음 무대는 마두금을 켜는 남자와 이상한 생명체의 동거가 일어나는데, 이 생명체는 털에 덮인 몸통에 하나의 구멍을 갖는 코끼리 코 같이 돌출된 것만을 갖춘 이른바 팔과 손, 입, 시선(구멍), 성기까지 하나로 외재화된 형태다. 일종의 이 손은 스스로에게서 외부로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 매개 장치인 셈이다. 또한 털로 덮여 불투명한 신체는 부드러움의 표피를 외재화하여 애완동물의 조건을 충족시켰다.

이 동물의 바동거림에 끊임없이 연주를 멈춰야 하는 것과 같이, 이 심금을 울리는 음악은 초라한 일상성을 비추는 딱 그만큼의 현실에 대한 찬가쯤으로 작용한다.

성벽을 배경으로 함은 이 공연을 위해 이미 준비된 성벽을 감싸는 조명, 무대 드넓은 바깥, 성벽 돌들 사이로 풀들, 신선한 바람이 극을 감싼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용수의 움직임은 이 드넓은 무대에서 넓게 활약하며 그 생동감을 과하지 않게 드러냈다.

마네킹과 인간의 동거, 인간 모형들과 인간의 혼종된 세계, 곧 그림자로만 인식되는 검은 사물들의 그림자극이 이어졌다. 이 극을 구경하는 관객으로서는 이 연대를 넘어, 이 마을의 주민이 된 듯한, 아니면 또 다른 주민으로 탄생한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곧 부족주의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은, 보이지 않는 순수한 집단의 폐쇄성이 생겨난다.

바꿔 말해 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의 연대의 개방성은 곧 이 안에서만, 미처 타자라고도 생각할 수 없이 성립하는 내가 아닌 우리 모두의 개방성이기도 했다.

이전 작품에 애초에 풍경만을 유유자적 구경하고 있는 두 명의 배우는 소원을 들고 불 붙여 날려 보내기를 관객과 함께 한다. 이 소원 빌기에는 삶이, 삶의 목소리가 자연 섞여든다.

앞선 작품에서 그 작품과 혼재된 세계에 그들은 위치해 있었고, 막상 성벽의 공연을 먼 거리에서 보고 있던 관객은 그 세계로 직접 이동해 당도한 끝에 이 소원 빌기의 의식에 동참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백 스테이지 투어이기도 했다. 또한 그 숨어 있던 암시된 세계의 서사 해독하기의 흥미로움을 주기도 했다. 이 중간에 어디든 가는 카페에서 음료수를 한잔씩 나눠 마셨다.

층진 담장 사이로 조그만 집들을 펼쳐 놓고 골목길 안에 골목길을 재현해 놓은 소담한 인형극은 관객에게 잘 만들었다는 감탄이 나오게 했다.

다시 마지막에 작은 상자에 마지막 쓰인 작은 오브제인 할머니를 집어넣음의 효과는 이 세계를 여닫고 또 펼침의 주재자 역할을 한다는 세계의 메타 층위를 가정하는 가운데, 마치 어린 시절의 놀이를 하듯 유희적 욕망과 세계 자체에 대한 무한한 경계를 그리는 서사 쓰기가 이뤄졌다. 사실 그 극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소원 빌기와 이 공연 사이에 개인적으로 어중간하게 끼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 앞서 피리와 장구가 만난 연주 공간의 연주와 이불을 양면으로 두르고 가면을 머리 위에 부착해 사람-인형의 혼재된 양상의 신체가 이질성을 드러냈다. 이는 잠에 든 나의 의식성(무의식의)의 생경한 지점을 외화한 것이기도 했다.

다시 처음의 장소에서 한 바퀴 공연-체험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다 모이고 탈 쓴 배우(솔문)는 탈춤을 하며 인간 얼굴을 한 사자에게 존재 물음을 한다. 도무지 정체를 알기 어려운 너는 무슨 종이냐는 말은 사자를 당황케 하지 않는다. 관객 역시 당황하지 않는다.

신화와 꿈의 작동,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과 환영, 실재와 배우, 스펙터클의 도시적 체험과 부족주의적 공명의 원시적 체험의 혼재된 양상에서 이질적인 것은 사건이라기보다 이 혼재 서사의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용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판이 벌어질 때쯤 차들이 유난히 많이 지나가며 극과 현실의 혼재된 양상을 또 한 차례 선사한다. 몇 명의 주민이 자연스레 춤판에 가세하며 탈을 받아쓰고 다른 이들도 춤에 동화된다.

극단 서울괴담의 <기이한 마을버스 여행-성북동>은 이동식 장소 특정적인 공연으로서 그 규모 면에서 스펙터클의 구현이자 배제할 수 없는 실재들을 중요한 미디어로 체감하며 곧 관객들은 그 미디어로서의 자신을 체험하며 어떤 경험의 서사를 구축할 수 있게 했다.

반면 이 공연이 갖는 낭만성은 현실에 붙박이지 않는 이질적 기억으로 이 성북동을 기억하게 만들 것 같다. 그래서 앞서 말한 주민들과의 ‘따뜻한 연대’는 균열하며 조금 더 정치적인 사유의 측면을 도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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